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봄날은 간다
'글. 유병숙'

소리꾼 장사익 선생이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노래를 한다. 오른손이 곡선을 그리더니 무릎장단을 친다. 장례식장이 일순 고요해졌다. 장례식장에서의 노랫가락은 생경했지만, 은은한 음색이 오히려 숙연한 분위기를 끌어내고 있었다.
장사익 선생은 고인의 친척이었다. 누님 가시는 길에 국화꽃 한 송이 올리러 왔다고 했다. 향을 지피고 절을 하더니 오래도록 엎드려있었다. 백수에 가까운 상주의 손을 맞잡은 선생이 그예 눈물을 떨구었다. 선생은 어려운 시절, 친척들을 외면하지 않았던 고인의 성품을 기렸다. 빈소에 가족들이 둥글게 둘러앉았다. 평소 장사익의 노래를 즐겨 들었다던 고인을 위해 선생은 서슴없이 노래 마당을 펼쳤다. 밤늦게까지 남아있던 조문객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고인의 며느리와 절친인 나는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그의 노래를 듣게 되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끊어질 듯 이어지는 가락은 마치 고인의 곡절 많은 인생을 위무하는 듯했다. 고인은 꽃다운 스무 살 나이에 스물네 살 낭군을 만났다. 연분홍빛 설렘이 빈소를 훅 치고 들어왔다. 사랑의 감정은 나이를 불문하는 걸까? 상주의 얼굴에 발그레한 꽃물이 피어올랐다. 영정사진을 올려다보았다. 팔순 때 찍었다는 사진은 막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층층시하에 엄한 가풍이 가슴의 설렘을 막아섰다. 생활의 난경難境에 망설임이 어찌 없으랴만 이미 불어온 봄바람을 뉘라서 막을 수 있으랴! 산처럼 쌓였을 사연이 너울거렸다. 그토록 그리던 임을 두고 어찌 떠나셨을까? 몰래 눈물을 훔쳤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가~안~다

노래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갔다. 상주가 한 말씀이 떠올랐다. 입관 때 보니 꽃에 둘러싸인 마나님이 너무나 고와 보여 당신도 인제 그만 그 곁에 누워 함께 가고 싶었단다. 무심한 듯 담담하게 던진 말에 괜스레 내 슬픔이 고개를 들었다.
고인은 슬하에 5남 1녀를 두었다. 집안을 일으켜 세운 여장부이기도 했다. 정릉동에 마련한 너른 집에는 일가친척이며 자식들, 손주, 증손주에 이르기까지 무시로 붐볐다. 부지런한 며느리는 맛난 음식으로 손님을 맞아들였다. 생의 마지막 설날에 보고 싶은 사람 모두 보고, 사진까지 남기고 떠나셨다. 구순을 넘겼다고는 하나 갑작스런 이별에 자손들의 얼굴에는 황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칠십여 년 생사고락을 함께한 부부애가 빈소를 애달프게 감싸 안았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드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달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단장을 끊을 듯 노래가 이어졌다. 선생의 노래를 좋아하는 나는 평소 자동차 라디오 볼륨을 부러 높이고 듣기도 했으며 따라 불러보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은 달리 들렸다. 그 어느 때보다 정성스런 그의 목청엔 집안의 어르신을 보내는 애틋함이 실렸다. 고인의 공덕이 얼마나 컸기에 장 선생은 이토록 애절하게 노랫말을 풀어내는 걸까?
노래에 몰입하기는 오랜만이었다. 음악에는 주술성이 있어 영혼을 취하게 한다더니 내가 그랬다. 도수 높은 술을 마신 듯 노래에 취해 정신이 혼미해졌다.
빈소는 천상병 시인의 「귀천」에 이어 「찔레꽃」으로 일렁였다. 가락에 몸을 실었다. 고인을 달래는 진혼곡의 물결은 슬픔의 불꽃을 꺼뜨리고 우리네 고달픔을 가만가만 어루만지고 있었다. 생전에 며느리와 함께 외출에 나선 고인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분은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다 인사를 하셨다. 그때의 말씀이 마지막 여운을 드리웠다. 나는 또 다른 무슨 인연으로 얽혔기에 여기에 앉아 이 노래를 듣고 있는 걸까? 문득 생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 나를 흔들어대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대답을 뒤로 한 채 다시 못 올 인생의 봄날이 아름다이 흘러가고 있었다.

EDITOR AE류정미
유병숙 작가
이메일 : freshybs@hanmail.net
『책과 인생』 등단
한국산문작가협회 명예회장
한국문인협회, 국제PEN 한국본부 회원
한국산문문학상, 에세이스트 올해의 작품상 2회 수상
제12회 한국문학백년상 수상
『충청매일』에 에세이 연재
『조선일보』에 에세이 게재
수필집 『그분이라면 생각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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