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백발 유감
'글. 유병숙'

거울을 본다. 늘어난 흰머리가 신경을 거스른다. 일전에 미용사는 염색하면 당장 십년은 젊어 보일 거라고 자신했다. 오년도 아니고 무려 십년이라니! 코웃음을 쳤지만 오랜 지기처럼 지내온 그녀의 말이 오늘따라 마음을 간질인다. 그녀의 덕담에 밀려 기어이 문을 나서고야 만다.
은발하면 강경화 전 외무부 장관이 먼저 떠오른다. 그분은 은발로 화제와 주위를 끈 적이 있었다. 기자가 염색하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본모습을 가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서란다. 유엔에 근무할 때는 염색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고도 했다. 강 장관의 영향 때문인지 은발이 한결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십여 년 전이었다. 친우의 딸내미 결혼식장에 동갑내기 친구가 반백의 모양새로 들어섰다. 달라진 모습에 깜짝 놀랐다. 그녀는 자식들이 일찍 혼인하여 벌써 여러 명의 손주를 두고 있었다. 어엿하게 할머니가 되었는데 염색 안 하는 게 뭐 어때서? 한다. 편안한 모습이 못내 보기에 좋았다.
다시 은발이 좋은 느낌으로 다가온 건 안사돈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은발이 그분의 얼굴을 환하게 했다. 소탈한 첫인상 덕분에 상견례가 부드럽게 진행되었다. 그래서인지 사돈지간에도 허물없이 지내게 되었다.
은발에 대한 충동이 일었다. 염색하고 나면 어김없이 침침해지는 눈도 은발을 부추겼다. 남편도 부쩍 염색을 말리고 나섰다. 자연스러운 게 멋스럽다나?
일 보러 나갈 때 우리 부부는 지하철을 즐겨 탄다. 남편은 당연하다는 듯 노약자석에 앉는다. 그러나 나는 나이를 핑계로 남편의 권유를 뿌리치곤 했다. 하루는 지켜보던 한 노인이 내 흰머리를 힐끗 바라보더니 자리를 권했다.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지만, 그 뒤로 은근히 노약자석을 즐기게 되었다. 때론 반백이 신간을 편하게 할 때가 있었다.
동생이 대번 눈을 흘겼다. 언니가 벌써 그럴 때야? 언니가 너무 젊어 보여 형부가 질투하는 건 아닐까? 자주 하게 되어 귀찮지만 염색하지 않으면 게으른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며 별소리를 다했다. 막내는 웃으며 언니 멋있어! 카리스마도 있어 보이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봐! 응원했다.
모임 때마다 내 반백이 도마 위에 올랐다. 그녀들은 너나없이 내 머리를 성토했다. 백 세 시대에 예순의 우리는 나이 축에도 들지 못한단다. 자식들 시집, 장가보내고 이제 좀 몸뚱이 좀 놀릴만해졌는데 벌써 그러면 겉늙는다, 흰머리에 그런 옷차림이 가당키나 하냐? 염색을 옷처럼 생각해라, 보고 있는 남을 위해서라도 염색하라고 야단들이었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젊은 시절 나는 어르신들의 백발을 인생의 관록처럼 여겼다. 어깨까지 빛나는 은발을 치렁치렁 내려뜨렸던 시아버지는 덕분에 인왕산 도사라 불렸다. 시어머니가 머리를 빗어 넘기면 앞부분에 집중된 흰머리가 학의 날개처럼 드러났다. 나도 나이가 들면 그렇게 살 줄 알았다.
어느 날 헤어숍의 점장은 벼르듯 염색을 권하고 나섰다. 가늘고 숱 없는 내 머리카락을 파마도 자제시키며 이십여 년을 지켜 온 그녀였다. 은발을 꿈꾸는 나의 고집에 일 년여 동안 묵묵히 머리를 자르고 다듬으며 반백에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아주려 애를 써왔다. 그러한 그녀가 내린 결론은 환한 은발이 되는 머리털이 아니요, 숱도 적어 어울리지 않는단다. 머리카락이 예뻐지는 방법은 단 하나 염색이었다. 영양제를 충분히 바르면 염색해도 머릿결이 덜 상한다며 끈기 있게 설득했다. 도대체 나보다 더 내 머리카락을 사랑하는 그녀라니! 나는 그녀의 말이 상술이 아닌 진심이라는 걸 안다.





염색하고 돌아와 거울을 들여다본다. 기대한 만큼은 아니더라도 확실히 염색이 주는 효과가 있어 보이긴 했다. 외출했다 들어서던 남편이 어? 염색했네 하며 환하게 웃는다. 그렇게도 염색을 말려대더니 이건 또 무슨 반응? 급히 긍정 모드로 궤도를 수정한 건 아닌지 그의 표정을 탐색한다. 한술 더 떠, 다음에는 보라색으로 염색하면 어때? 하는 바람에 놀란다. 은사의 사모님이 보랏빛 물을 들였던데 멋들어졌다나? 아이고 그동안 나는 남편에게 또 무슨 가스라이팅(?)을 당했던 걸까?
시절마다 트렌드가 있기 마련이다. 요즘의 트렌드는 단연 젊음이다. 다들 젊게 보이려하고 젊게 살려 애쓴다. 듣고 보니 대담한 색깔로 염색한 이들이 떠올랐다. 개성을 창출하고 있는 그들은 어쩌면 유채색 세상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간 나는 변화하는 세태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었던 건 아닐까? 무채색 머리로 살아온 시간도 과히 나쁘지는 않았으나, 나의 머리 색깔이 대체 뭐라고, 파수꾼처럼 내 머리의 표정을 살피고, 그토록 많은 관심과 조언을 아끼지 않는 이들이 새삼 고맙게 느껴진다.
내가 잠근 열쇠는 결국 내가 풀어야 한다. 은발이든 염색 머리든 누가 하란다고 하고, 하지 말란다고 하지 않았겠는가. 어쩌면 하고 싶었던 일에 꾸준히 핑계를 대고 있었는지도? 한편, 나의 의지는 풍속에 꺾여 시대가 원하는 대로 맞춰지는 중인지도 모른다.
무슨 변덕이 찾아와 또 은발을 충동할는지 모르겠으나 당분간 나는 염색한 여자로 이 시절을 넘어 볼 예정이다. 또 누가 알겠는가? 물들인 머리가 삼손의 머리카락처럼 열일을 할지도?

EDITOR 편집팀
유병숙 작가
이메일 : freshybs@hanmail.net
『책과 인생』 등단
한국산문작가협회 명예회장
한국문인협회, 국제PEN 한국본부 회원
한국산문문학상, 에세이스트 올해의 작품상 2회 수상
제12회 한국문학백년상 수상
『충청매일』에 에세이 연재
『조선일보』에 에세이 게재
수필집 『그분이라면 생각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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