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욕망은 늙지 않는다
'글. 유병숙'

아침나절에 우이신설 경전철을 탔다. 어르신 승객이 많았다. 승객들 사이로 호리호리한 여인이 들어섰다. 잿빛 머리에 얹힌 모자, 허리가 잘록한 외투, 외투 자락 사이로 보이는 짧은 바지, 앙증맞은 가방, 무릎까지 올라오는 장 부츠까지 그녀의 입성은 연회색 일색이었다. 노인들의 유니폼 같은, 알록달록 꽃무늬가 새겨진 복장들 사이에서 그녀의 모습은 단연 이색적이었다.
그녀는 다리를 꼬고 앉은 젊은이 옆자리에 앉았다. 당신도 이내 다리를 꼬았다. 앞에서 바라보니 마스크나 옷으로도 감출 수 없는 노년의 그림자가 보였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차림새를 한 그 여인에게 호기심 어린 눈길이 쏠렸다. 그녀는 허리를 펴고 자세를 꼿꼿하게 고쳐 앉았다. 타인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 당당한 태도가 훔쳐보고 있는 나를 도리어 무색하게 했다.





그녀의 옷차림을 바라보고 있자니 최근 들어 엄마가 즐겨 입게 된 옷가지들이 떠올랐다. 노인이 입을 만한 옷을 찾으려고 가게를 돌다 보면 주인들은 하나같이 꽃무늬나 반짝이가 박힌 옷들을 내놓았다. 엄마가 평소 선호하지 않던 모양새였다. 무늬와 색상은 차치하고라도 사이즈가 편편치 않아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노인에 대한 옷 가게의 부족한 배려에 섭섭한 감정이 들곤 했다.
살면서 한 번도 당신 옷에 까탈 부린 적 없는 엄마가 옷에 예민하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요양원에 입소하고부터였다. 하루는 흰색 블라우스를 사 달라 하셨다. 엄마가 찾는 블라우스는 목과 소매에 잔주름이 잡힌, 카디건을 겹쳐 입으면 주름 부분이 돋보이는 여성스러운 옷이었다. 언제 눈여겨 보아두신 걸까? 팔순 중반을 넘어선 연세에도 눈썰미는 여전하다 싶었다. 엄마한테 맞을만한 게 있으려나? 반신반의하며 가게를 순례했지만 찾지 못했다. 인터넷 쇼핑몰을 검색하니 마침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브랜드에 비슷한 옷이 있었다. 하지만 허리가 굽은 엄마의 등을 덮어 줄 정도의 큰 사이즈는 없었다.
아이처럼 기대에 차 기다리고 있을 엄마를 떠올리자 마음이 급해졌다. 생각다 못해 옷 도매시장을 수시로 드나드는 양품점 주인에게 부탁했다. “누워만 계시는 분이 웬 블라우스 타령인지 모르겠어요?” 하니 그녀는 단박 “여자이니까!” 한다. “어머니도 여자예요. 나이가 들어도 마음은 늙지 않아요.” 단골이 많은 그녀는 옷매무새뿐만 아니라 고객의 마음도 매만져줄 줄 알았다. 허나 그녀의 마음 씀씀이에도 불구하고 엄마에게 맞춤한 사이즈를 끝내 찾지 못했다.
특별하게 외출할 일도 없는데 무슨 멋쟁이 옷이 그리 필요한 걸까? 답답한 나머지 요양원 밴드에 올라온 입소자들의 사진을 검색해보았다. 하나같이 엇비슷한 모양과 무늬의 옷을 입고 마스크까지 하고 있어 엄마를 찾는데 한참 걸렸다. 엄마의 옷 타령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면회 때마다 머리 염색 좀 해달라고 졸라대시는 통에 당황하기도 했다. 희끗희끗해진 머리카락이 훨씬 자연스럽고 멋져 보인다고 말씀드려도 막무가내였다. 당장 모시고 나와 염색해드리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지만 코로나 사태로 병원 진료 이외의 외출은 허락되지 않았다. 철부지 아이를 대하듯 달래기도 하고, 짜증을 내기도 했다. 혹시나 해서 예의 밴드의 사진들을 꼼꼼히 들여다보니 염색한 어르신들이 더러 눈에 띄었다. 남에게 추레하게 보이고 싶지 않은 당신의 속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 같아 괜스레 송구한 마음이 들었다. 불편한 몸에도 꾸미기를 멈추지 않으려는 엄마가 경이롭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해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예의 장 부츠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꼿꼿한 몸매의 그녀가 외투 자락을 휘날리며 걸어갔다. 걸음걸이가 마치 모델처럼 당당했다. 뒤태만 봐서는 누가 그녀를 노인이라 하겠는가? 어쩌면 그녀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보다 오직 자신만을 위해 꾸미고 나선 길인지도 모른다. 저 연세에 저렇듯 건강한 몸매를 유지하기도 쉽지 않았으리라. 까닭 없이 그녀의 당찬 모습이 부러웠다. 유행하는 가죽점퍼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런웨이를 걸으며 멋진 노년을 설계하고 있는 시니어 모델들이 떠올랐다. 굳어진 내 관념이 한순간에 부서져 내렸다. 생각만으로 창조되는 내일은 없다.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남아 있다면, 그로인해 가슴이 뛴다면 더는 머뭇거리지 말 일이다. 나도 모르게 여인에게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영화 〈비터문〉의 원작자인 프랑스 소설가 파스칼 브뤼크네르는 “젊은이도 늙은이도 욕망 앞에 평등하다”고 했다. 푸릇푸릇한 정신이 엄마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박한 욕망일망정 그를 통해 당신의 자존감을 전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요양원 면회 날짜가 기다려진다. 어려운 상황에도 시들지 않는 엄마의 욕망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응원하리라 마음먹는다.

EDITOR AE류정미
유병숙 작가
이메일 : freshybs@hanmail.net
『책과 인생』 등단
한국산문작가협회 명예회장
한국문인협회, 국제PEN 한국본부 회원
한국산문문학상, 에세이스트 올해의 작품상 2회 수상
제12회 한국문학백년상 수상
『충청매일』에 에세이 연재
『조선일보』에 에세이 게재
수필집 『그분이라면 생각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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