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오드리 헵번처럼
'글. 유병숙'

문득 걸음을 멈추고 거리를 바라본다. 이대로 아무 버스나 잡아타고 멀리 떠나버릴까? 바람이 옷자락을 흔든다. 스쿠터를 탄 한 쌍의 젊은이가 팝콘 같은 웃음을 터뜨리며 곁을 지난다. 순간 영화 「로마의 휴일」 (1953년,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떠오른다. 가슴이 방망이질한다. 과도한 스케줄에 시달리던 앤 공주(오드리 헵번 분)에게 의사는 “최선책은 잠시라도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라고 했던가. 나는 충동적으로 인천공항 행 버스에 올라탄다. 영화의 한 컷, 한 컷이 차창에 서린다. 각국의 대사를 영접하는 자리에서 긴 드레스 속 하이힐을 살짝 벗어놓는 장면이 생각나 구두를 벗는다. 발바닥이 한숨을 토한다.
영화는 앤 공주의 일탈을 그리고 있다. 특종을 노리고 접근한 신문기자 조 (그레고리 펙 분)에게 공주는 들뜬 표정으로 말한다. “온종일 좋아하는 것만 하고 싶어요. 노상카페에 앉고, 쇼핑을 하고, 빗속을 걷고…. 재미있고 아주 흥미로울 거예요.” 조는 못 할 이유가 없다 부추기며 오늘은 ‘휴일’이라고 한다.
서로의 신분을 숨긴 채 공주와 조는 스쿠터를 타고 로마의 곳곳을 돌며 꿈같은 하루를 보낸다. 조와 공모한 사진 기자는 그런 공주의 모습을 몰래 찍는다. 조와 공주는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지만, 현실에서 그들의 관계는 불가능했다. 조는 말한다. “인생이란 늘 좋은 것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결국 공주는 자신이 돌아가야 할 자리가 있음을 깨닫는다.

사진출처: DAUM 영화


조와 공주는 공식 인터뷰 자리에서 이별의 악수를 한다. 그간 찍은 사진들을 그녀에게 전달한다. 공주가 사라지자 조는 망연하게 홀을 바라본다. 돌아서 나오는 조의 구두 소리가 쓸쓸한 궁정을 울리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마치 어제 본 듯 장면들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사실 나는 영화가 가져온 갖가지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었다. 툭하면 일탈을 꿈꾸었고, 로맨틱 코미디류를 즐겨 보게 되었다. 앤 공주가 젤라토를 먹던 스페인 광장, 조각상 ‘진실의 입’, 콜로세움, 포로 로마노, 바르카챠 분수, 산타 젤로 성, 콜로나 궁전, 노천카페, 게벨 강 등등 로마의 풍광을 담고 있는 영화는 ‘로마 앓이’라는 심각한 병을 불러왔다. 병이 깊어 갈 무렵 운 좋게도 로마행 티켓이 손에 들어왔다.
영화의 장면들을 떠올리며 스케줄을 짰다. 곳곳에서 오드리 헵번의 숨결을 찾으려 애를 썼다. 금방이라도 그녀가 상큼하게 웃으며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들뜬 기분은 스페인 광장을 들어서면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공주가 서 있던 계단에는 사진을 찍으려는 수많은 관광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계단 아래에는 젤라토를 파는 노점상이 즐비했다. 관광객에게는 터무니없는 비싼 값을 불러댔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추운 날씨에 덜덜 떨며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달콤하기는커녕 불량식품 맛이 났다. 헵번은 어떻게 이걸 그리 맛나게 먹었던 걸까?
콜로세움으로 갔으나 입장 시간에 늦었다. 건축물에 어스름이 내려앉았다. 입구에는 푸르스름한 조명등이 켜졌다. 거대한 조형물을 끼고 묵묵히 걸었다. 내 머릿속에 가득했던 로마에의 환상이 깨졌다. 영화 같은 현실은 없었다.
로마행은 시집살이에 매였던 내가 처음으로 오롯이 나만 데리고 떠났던 여행이었다. 고달픈 쳇바퀴에서 벗어난 나는 마음 가는 대로 로마의 거리를 쏘다녔다. 색색의 스카프가 진열된 가게를 기웃거리고, 열쇠고리 파는 기념품 집을 들락거렸으며, 피자집을 찾아 뒷골목을 헤매었다. 스쿠터 대신 택시를 타고 사방에 흩어져 있는 유적지를 순례했다. 시간은 느긋했고 태양은 눈부셨다. 낯선 집 마당에 널어놓은 빨래가 바람에 휘날리는 걸 바라보다 까닭 없이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거꾸로 던지면 다시 로마에 온다고 했던가? 아직 로마행은 요원하기만 하다. 눈코 뜰 새 없는 일상에서 로마의 풍광은 잠깐잠깐 떠올랐다 사라졌다. 여행 당시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흐른 후 돌이켜 보니 로마 여행은 앤 공주 못지않게 나에게도 달콤한 일탈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버스가 인천공항 도착을 알린다. 하릴없이 대합실을 어슬렁거린다. 관광객들이 캐리어를 밀며 들뜬 표정으로 오간다. 출국 절차를 밟고 있는 사람들 틈에서 괜스레 설레다 이방인이 된다. 비행기 출발을 알리는 전광판 앞에 한참을 서 있다 걸음을 옮긴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입국장으로 향한다. 문이 열릴 때마다 사람들이 밀려 나온다. 얼싸안고 반기는 모습들이 눈길을 끈다. 따스한 기운이 스민다.
여행에 앞서 나는 버릇처럼 돌아올 날부터 메모하곤 했다. 마치 돌아올 곳이 있기에 떠난다는 것처럼…. “왕실과 조국에 대한 의무를 잊고 있었다면 오늘 밤 돌아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영원히!” 궁으로 돌아온 공주를 심하게 채근하는 공작과 백작 부인에게 했던 앤 공주의 단호한 말이 문득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대합실 창이 어둑해진다. 서울행 버스에 오른다. 버스는 나를 다시 집 앞에 내려놓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한숨을 토해낸다. 공주의 마음도 이러했을까? 공항에서 멀어질수록 마음이 점점 답답해진다. 오늘 해결해야 했을 산적한 일들이 나를 나무란다. 언젠가 나에게도 진정 ‘휴일’이 찾아올까? “인생이란 언제나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영화 속 대사가 오늘따라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EDITOR AE류정미
유병숙 작가
이메일 : freshybs@hanmail.net
『책과 인생』 등단
한국산문작가협회 명예회장
한국문인협회, 국제PEN 한국본부 회원
한국산문문학상, 에세이스트 올해의 작품상 2회 수상
제12회 한국문학백년상 수상
『충청매일』에 에세이 연재
『조선일보』에 에세이 게재
수필집 『그분이라면 생각해볼게요』
본 칼럼니스트의 최근 글 더보기
해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