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박수를 기다리며
'글. 유병숙'

남편 위암 수술 전날, 주치의가 수술동의서가 담긴 태블릿 PC를 들고 왔다. 문항마다 사인하라고 했다. ‘복부를 개복하여….’ 라는 문항에 이르자 깜짝 놀랐다. 복강경 수술이 아니었나요? 병이 깊어 개복 수술이 예상된단다. ‘개복 후 암이 넓게 퍼져 있으면 그냥 덮을 수도 있으며….’ CT를 비롯한 정밀한 검사보다 육안 확인이 우선되었다. 서명을 마친 남편은 요식행위니, 걱정 말라며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이십여 년 전 시어머니도 위암 수술을 했다. 수술 전날 주치의가 수술동의서를 내게 내밀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하며 그는 문항들을 읽어 주었다. 서명하는데 손이 떨렸다. 잘하는 걸까? 수술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모든 책임을 내게 물을 것 같았다. 어머니께는 내용을 말씀드리지 않았다. 수술실에 들어가며 어머니는 마치 소풍이라도 가듯 빨리 마치고 올게! 하시며 승리의 V자를 만들어 흔드셨다. 말기 암을 초기 암이라고 숨겨왔던 자식들은 가슴에 시퍼런 멍을 숨기고 있었다. 새삼 그날의 풍경이 선하게 떠올랐다.





남편 지인들의 전화가 쇄도했다. 그들의 응원이 절실하게 새겨졌다. 초연한 척해도 남편의 모습은 초조해 보였다. 부처님, 예수님, 천지신명님,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에게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문득 내 전화기를 들여다보았다. 그 흔한 친구들로부터 문자 한 통이 없었다. 남편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안부 전화 한 마디 없는 친구들이 떠올랐다. 부르면 득달같이 달려오리라 믿었던 그들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어려울 때 사람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야속한 마음에 누구는 정이 없다느니, 겉과 속이 다르다느니 하면서 친구들을 하나하나 분석하기 시작했다. 내가 다시는 연락하나 봐라! 이제 끝이야! 그 어떤 모임에도 나가지 않을 거야! 우리의 우정이란 게 고작 이 정도였네. 내가 자기네 가족들이 입원하면 병문안 갔던 게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서운함은 까닭 없는 분노로 바뀌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자꾸만 전화기를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오지 않는 전화를 어쩌랴!
찻잔을 들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햇볕이 공원을 비추고 있었다. 겨울답지 않은 따뜻한 오후였다. 비둘기 떼가 광장에 내려앉았다. 젊은이들의 발랄한 웃음이 공허하게 들렸다. 저들은 뭐가 저렇게 좋은 걸까?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진 듯 가슴이 아팠다. 내가 잘못 살았나? 자책감이 밀려왔다.
엉뚱하게도 수십 년 전 애들과 함께 보았던 《피터 팬(Peter Pan)》 연극이 떠올랐다. 요정 팅커 벨(Tinker Bell)이 죽어가자 피터 팬은 세상의 어린아이들에게 사랑의 박수를 보내 달라고 했다. 아이들은 귀가 빨개지도록 힘차게 박수를 보냈다. 쓰러졌던 팅커 벨은 힘을 얻었고 다시 일어나 하늘을 날았다.
남편에게도 그 어느 때 보다 박수가 필요한 건 아닐까? 나는 전화기를 들었다. 체면 불고하고 친구들에게 카톡을 보내기 시작했다. 참 많이 보고 싶었다고, 내일 남편이 수술한다고, 기도 부탁한다고.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문자를 보내기 무섭게 답이 왔다. 친구들은 먼저 소식 주어 고맙다고, 혹시나 누가 될까 봐, 나쁜 소식 들으면 어쩌나 걱정되어 차마 전화 못했다며 미안해했다. 당장 면회 오겠다는 친구, 내일 일찍 수술실로 달려오겠다는 친구, 밥 잘 챙겨 먹고 기운 내라는 친구, 기도문을 적어 보내는 친구, 수술 시간 내내 기도하겠다는 친구도 있었다. 한번 불붙은 카톡은 밤새도록 멈추지 않았다.
넋두리로 들릴까 봐, 자존심을 내세우며 전화도 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던 시간이 부끄러웠다. 나도 당하기 전엔 이런 마음까지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상황이 좋지 않으니 원망의 화살을 밖으로 돌리고 있었다. 내 가슴앓이는 한낮 어리광에 불과했다. 따지고 보면 친구들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들여다보면 그들도 나름대로 상처를 지니고 살지 않던가. 말 안 해도 내 마음 다 알고 있다는 친구들, 과연 나는 그들에게 얼마나 믿음을 주는 친구였을까?
위로와 응원이 봇물 터지듯 밀려들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박수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EDITOR AE류정미
유병숙 작가
이메일 : freshybs@hanmail.net
『책과 인생』 등단
한국산문작가협회 명예회장
한국문인협회, 국제PEN 한국본부 회원
한국산문문학상, 에세이스트 올해의 작품상 2회 수상
제12회 한국문학백년상 수상
『충청매일』에 에세이 연재
『조선일보』에 에세이 게재
수필집 『그분이라면 생각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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