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즐거운 나의 집
'글. 유병숙'

마트에 들어서니 페리오치약을 들고 있던 홍보원이 다가왔다. 5개 묶음 한 세트를 사면 하나 더 끼워준단다. 물끄러미 치약을 바라보았다. 까닭 없이 가슴에 통증이 지나갔다. 불쑥 잊고 있던 옛 추억과 마주하게 되었다.
신혼 초, 시부모님을 뵈러 오는 친척과 이웃들의 발걸음이 연일 끊이지 않았다. 밥상 차리랴, 청소하랴, 빨래하랴 동동거리다 보면 하루해가 저물었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한동안 화제에 오르내렸다. 밥을 조금 먹는다고, 젓가락질이 서툴다고, 신발을 질질 끌고 다닌다며 한마디씩 했다. 키가 멀대처럼 크다, 손도 발도 도둑놈처럼 크다며 수군거렸다. 한번은 허리가 참 길기도 하네 하며 내 등을 툭, 치기도 했다. 생전 처음 맞닥뜨리는 일이 당혹스러웠다. 시샘인지 관심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지금 같으면 맞아, 맞아! 하고 웃어넘길 일이지만, 그 시절 나는 무슨 잘못이나 한 듯 점점 소심해져 갔다.
사달이 난 건 페리오치약 때문이었다. ‘하얀 치아, 상큼한 향기’를 내세운, 생소한 외국어 명칭의 치약 광고가 호기심을 자극했다. “어머니, 우리도 페리오치약 한 번 써볼까요?” 여쭈었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어머니는 “그게 그거지. 너도 참, 별걸 다 사고 싶구나! 저렇게 광고를 해대니 보나마나 비싸겠지….” 하며 무안을 주었다. 평소와는 다른 말씨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며칠 후 주말, 느지막이 일어나 양치질을 하던 막내 시누이가 볼멘 목소리로 “엄마, 불소치약이 뭐야. 우리도 이제 세련되게 페리오치약 씁시다!” 한다. 콕 짚어 페리오치약을 호명하는데 덜컥 겁부터 났다. 필시 꾸중이 떨어지겠지 했는데 웬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어머니는 나를 돌아보며 당장 사 오란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하루아침에 콩쥐가 된 심정이었다. 그 시절 나에겐 경제권이 없었다. 시어머니가 선뜻 내미는 돈을 받아들고 터덜터덜 언덕을 내려가는데 자꾸 가슴이 울컥거렸다.



가게 앞에서 앞집 아주머니와 마주쳤다. “얼굴이 왜 그래?” 하는 말에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졌다. 놀라 토끼 눈이 된 그분이 나를 감싸 안고 골목으로 데려갔다. 그간 쌓였던 설움이 한꺼번에 복받쳐 올랐다. 한 번 터진 울음은 쉽게 그쳐지지 않았다. 하루가 멀다고 우리 집에 마실 오던 아주머니는 당신의 젊어 고생담을 재미나게 들려주곤 했다. 나와 동갑내기 아들을 두어서인지 평소 내가 얼굴을 찡그리기만 해도 어디가 아프냐며 살갑게 대했다. “아이고, 오늘 일진이 안 좋아 그래….” 하며 일일이 마음에 담아두면 못쓴다고 나를 다독였다. 당부에도 불구하고 먼바다 외딴 섬처럼 때때로 외로움을 앓게 되었다.
수다한 시댁 가족들은 토요일 저녁이면 모두 몰려와 밤새 이야기꽃을 피웠다. 흥이 나면 누가 없어진 줄도 모를 지경이었다. 슬며시 마당으로 나갔다. 밤하늘에는 별들이 불을 켜고 있었다. 담 너머로 앞집을 바라보았다. 창문마다 불빛이 환했다. 순간 친정집이 떠올랐다. 그렇다! 나에게도 저렇게 불빛 따스한 집이 있었지 않은가!
그리운 시절, 밤이 내리는 버스 정류장에는 늘 친정어머니가 마중 나와 있었다. 종알종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걷는 길은 포근했다. 어머니는 무슨 중요한 이야기라도 되는 양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골목들을 돌아 막바지에 놓인 계단에 올라서면 멀리 우리 집 바깥 창문에 드리운 불빛이 보였다. 나는 그 60촉 전구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곤 했다.
아버지의 호탕한 웃음소리, 난로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털실을 감던 어머니, 동생들과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아버지의 우스갯소리에 배꼽을 잡았던 추억들이 떠올라 울컥 가슴이 뜨거워졌다. 언제나 그때처럼 따뜻한 아랫목에 두 다리 쭉 벋고 앉아 마음 턱 놓고 쉴 수 있을까?

새에게 덤불은 얼마나 아늑한가// 바람과 비와 눈을 피할 수 있는 곳,/ 번철처럼 타오르는 햇빛과/ 바늘처럼 아픈 추위를 막아주는 곳,// 집을 지어 알을 낳고 새끼를 치며/ 슬플 때 즐거울 때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곳,/ 이른 아침 이슬로 목을 축이고/ 한밤중 달빛을 덮고 잠을 자는 곳,//새에게 덤불은 얼마나 아늑한가// 내가 한 마리 새로 세상을/ 주유할 때 먼 곳에서 자주 떠올리는/ 덤불 같은 집은 얼마나 아늑한가
-이재무 시, ‘덤불에 대하여’ 전문-

우연한 기회에 막내 시누이와 함께 긴 여행을 다녀왔다. 김포공항에 착륙하려고 비행기가 상공을 휘돌았다. 도시의 휘황한 불빛을 내려다보던 시누이가 “떠날 때는 복잡한 서울에 다시 오고 싶지 않았는데, 돌아와 막상 저 불빛을 바라보니 이상하게 마음이 놓여요.” 한다. 시누이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새삼스레 불빛이 눈물겹게 보였다. 불빛을 타고 마천루를 지나 나의 안식처까지 둥둥 떠가는 환상에 잠겼다. 여독으로 쌓인 피로가 감미롭게 느껴졌다. 돌아갈 집이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해 보면 집에서 출발한 나는 늘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우리를 기다리며 시어머니는 불을 대낮처럼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마치 나를 향해 노란 손수건을 흔드는 것 같았다. 한 상 가득 차려진 밥상을 받았다. 내가 좋아하는 시원한 물김치를 밀어주며 시어머니는 많이 먹으라 눈짓을 했다. 먼 길을 돌아 나는 비로소 ‘즐거운 나의 집’에 안착하였다.
김남조 시인은 <겨울 바다>에서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이라고 했다. 나도 이제 시어머니가 되었다. 치약 사건은 딸과 며느리를 대하는 나의 마음에 반면교사가 되었다. 페리오치약을 가만히 쓰다듬어 보았다. 그 옛날 차마 부르지 못한 노래가 가슴에 차올랐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EDITOR AE류정미
유병숙 작가
이메일 : freshybs@hanmail.net
『책과 인생』 등단
한국산문작가협회 명예회장
한국문인협회, 국제PEN 한국본부 회원
한국산문문학상, 에세이스트 올해의 작품상 2회 수상
제12회 한국문학백년상 수상
『충청매일』에 에세이 연재
『조선일보』에 에세이 게재
수필집 『그분이라면 생각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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