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엄마의 웃음
'글. 유병숙'

남편이 입원하자 친우가 문병을 왔다. 헤어지며 너, 잘 웃었는데… 네 얼굴에 표정이 없네. 많이 힘들지? 힘내! 내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새삼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충혈된 눈, 처진 입술, 내가 보기에도 낯설게 느껴졌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 엄마의 걱정스런 표정이 겹쳐졌다. 나는 늘 엄마를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웬일일까? 엄마처럼 짙은 쌍꺼풀도 없었고, 마늘코도 아니었다. 한데, 거울을 들여다볼수록 닮은꼴이 하나, 둘 늘어나더니 내 얼굴에 엄마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 가을이었다. 하교하고 집에 들어서자 마당의 빨래가 나를 맞았다. 밤을 배경으로 나부끼는 빨래는 괜스레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언니 왔어? 부엌에서 동생들이 다투어 튀어나왔다. 니들이 왜 거기 있어? 가방을 던지고 들여다보니 아랫집 아주머니가 오셔서 엄마 대신 저녁 밥상을 차려주고 있었다.
아버지가 근무 중 과로로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고 엄마는 부랴부랴 병원으로 달려갔단다. 당시 전화기가 없었던 우리 집은 인편으로 연락을 받았다. 도리 없이 엄마 오시길 기다리며 가슴을 졸였다. 풀죽은 동생들을 보니 잠이 오지 않았다. 언니, 아부지 괜찮겠지? 훌쩍이는 동생들을 달래서 재웠다. 빨래를 걷고, 물을 길어다 설거지를 하고, 옷을 개켜두었다. 당장 내일 입고 갈 교복들을 손질하고 막냇동생 책가방도 들여다보았다. 일거리는 끝이 없었다. 엄마는 이 많은 일을 어찌 감당했을까? 엄마의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졌다.



밤새 아버지의 안위를 걱정하다 엄마가 오지 않자 덜컥 겁이 났다. 아버지가 못 일어나시면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당장 내일 학교는 갈 수 있을까? 학업을 멈추고 동네 친구들처럼 가발 공장, 봉제 공장에 다녀야 할까? 온갖 이기적인 걱정이 고개를 들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화들짝 잠이 깼다. 엄마가 돌아오셨나? 벌떡 일어나 부엌을 바라보니 삼십 촉 전구가 켜져 있었다. 이슬을 밟고 오신 엄마는 쉬지도 못하고 우렁각시처럼 도시락을 싸고 계셨다. 목에 메어 멍하니 엄마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어떻게 되셨을까? 그 잠깐의 찰나가 백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나를 보자 엄마는 내 손을 덥석 잡으며 전에 없이 함박웃음을 지으셨다. 동생들 잘 돌봐주어 고맙네. 잘했다. 아버지는 괜찮아. 병원에 들어가신 김에 주사도 맞고 며칠 치료하면 일어나실 거야. 걱정하지 말아. 나는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엄마는 내 어깨를 툭툭 쳐주셨다.
평소 잘 웃지 않는 엄마였다. 크게 웃을 일이 생겨도 살짝 미소만 띠었다. 반면 아버지는 우스갯소리를 잘하셨다. 아버지의 농담에 우리 4남매가 웃다가 데굴데굴 굴러도 엄마는 별로 웃지 않았다. 오히려 실없는 소리 그만하라며 지청구를 날리기 일쑤였다.
어린 시절 나는 늘 엄마의 웃음이 고팠다. 엄마가 얼굴을 펴지 않는 날이면 꼭 혼날 일이 생길 것 같아 괜스레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어쩌다 엄마의 인색한 웃음이라도 만나는 날이면 마음에 봄바람이 일었다. 그런 엄마가 그 새벽, 유난히 환하게 웃고 계신 것이었다!
엄마의 웃음에 걱정 길었던 지난밤이 하얗게 지워졌다. 울컥 눈물이 나왔다. 엄마는 언제 와? 어린아이처럼 물었다. 저녁에 밥 차려주러 올게. 엄마는 웃고 계신데 나는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돌이켜보면 지금의 나보다 한참 젊었던 엄마였다. 아직도 생의 고비마다 허둥지둥, 눈물 바람인 나를 돌아본다. 건장했던 가장의 급작스러운 병고가 청천벽력이었을 텐데 엄마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난 걸까? 이제야 우물 속처럼 깊었던 엄마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어려움을 딛고 앞으로 나갈 수 있었으리라.
엄마의 웃음은 내 인생의 나침반이었다. 삶이 가파른 언덕을 만날 때마다 나는 엄마를 찾았다.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걱정하지 말어. 어깨를 툭툭 쳐주던 예의 웃음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웃음을 떠올리자 간절하게 엄마가 보고 싶어졌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엄마 흉내를 내 보았다. 웃다 보니 용기가 났다. 투병 중인 남편을 바라보았다. 괜찮다, 다 괜찮아질 거야. 걱정하지 말어. 엄마의 주문을 따라 해본다. 거울 속 엄마가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EDITOR AE류정미
유병숙 작가
이메일 : freshybs@hanmail.net
『책과 인생』 등단
한국산문작가협회 명예회장
한국문인협회, 국제PEN 한국본부 회원
한국산문문학상, 에세이스트 올해의 작품상 2회 수상
제12회 한국문학백년상 수상
『충청매일』에 에세이 연재
『조선일보』에 에세이 게재
수필집 『그분이라면 생각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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