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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주간지 K-공감
무대 위에서 남북의 벽을 없애는 것이 내가 할 일
'연극 ‘열 번째 봄’ 연출한 탈북민 출신 오진하 감독'

통일부 남북통합문화센터 통합체험팀 예술감독. 오진하 감독이 건넨 명함에 적힌 직함이다. 2003년 탈북 후 한국에 최종 정착한 그는 서울 강서구 남북통합문화센터에 매일 출근하며 북한이탈주민 인식 개선, 남북문화 공감 및 확대와 관련된 강연과 교육 전반을 담당하고 있다. ‘예술감독’이라는 타이틀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가장 주된 업무는 공연 등 예술과 관련된 활동이다. 최근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와 남북통합문화센터가 함께 제작한 연극 ‘열 번째 봄’의 연출을 그가 맡았다.
‘열 번째 봄’은 오 감독이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북한이탈주민이 우리 사회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과 그것을 극복하고 성장하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20대 여성 주인공이 등장해 한국 사회에서 경험하는 일을 현실적으로 그려냈다. 공연은 총 네 차례(3월 30일, 6월 22일, 9월 21일, 12월 7일) 선보이는데 7월 14일 ‘북한이탈주민의 날’ 제정을 계기로 두 번째 공연이 특히 주목을 받았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문승현 통일부 차관이 함께 연극을 관람했고 탈북 예술인이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다양한 예술정책 지원을 약속하는 등 유의미한 자리를 가졌다. 오 감독 역시 자리를 함께하며 북한이탈주민의 창작예술분야 지원에 힘을 써달라고 목소리를 냈다.
오 감독이 탈북 예술인, 그중에서도 창작예술분야 종사자에게 관심을 쏟는 배경에는 그가 걸어온 길이 있다. 1964년생인 오 감독은 평양연극영화대학 출신으로 북한에서 배우 생활을 10년 정도 했다. 연극연출에 뜻이 있던 그는 2003년 해외 단기 파견직으로 중국 출장을 갔고, 기간이 만료된 후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고 유학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다 한국행을 선택한 그는 명지대 공연예술학과를 졸업, 예술감독으로서 삶에 충실하고 있다. 연극 ‘풍계리 진달래’, ‘자강도의 추억’, ‘그곳에 봄이 오면’ 등과 뮤지컬 ‘Until The Day’가 그의 연출작이다. 오 감독은 영화 미술감독과 조감독 및 배우로도 참여하면서 활동 반경을 넓혀왔다.

오진하 감독은 연극 ‘열 번째 봄’을 통해 북한이탈주민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진. C영상미디어)



연극 ‘열 번째 봄’ 질문부터 하겠다. 20대 여성이 주인공이니 본인의 경험담은 아닐 테고 어떻게 만들어진 이야기인가?
내가 목격한 이야기다. 대본을 쓰기 위해 북한이탈주민에 관한 현장 취재를 다니면서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나봤다. 작품 속 주인공은 여성이고 20대고 혼자다. 얼마나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았겠나. 그걸 있는 그대로 전달하고 극복해낸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북한이탈주민은 연극을 보면서 공감대를 형성했겠다.
하나원(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에 입소해 있는 북한이탈주민들이 많이 와서 봤다. 그들은 아직 한국 사회를 잘 모른다. 주로 드라마만 봤으니까 대단히 환상에 젖어 있었는데 ‘열 번째 봄’을 통해 현실이 만만치 않다고 느꼈다고 하더라. 교육은 그렇게 돼야 한다고 본다. ‘대한민국은 살기 좋은 곳이다’, ‘노력하면 다 이뤄진다’는 가르침보다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맞다. 긍정적인 면만 보다간 현실에서 푹 쓰러진다. 어느 정도 마음의 다듬이질을 해서 나와야 한다.
경험담인가?
그렇다. 처음 연극을 기획할 때 교육적인 효과가 있게 해달라는 주문을 받았는데 나는 반대했다. 한국을 포함한 어디든 좋은 모습만 있는 건 아니다. 처음부터 좋은 사람도 있고 안 좋은 사람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현실을 반영한 메시지를 담고 싶었다. 대신 이번 연극에는 비속어가 없다. 모든 육두문자를 제거했다. 북한에서는 작품에서 비속어를 못 써서 화를 내야 할 때는 연기나 행동으로 표현하는데 이번 작품에서 그렇게 해봤다.

오진하 감독이 연출한 연극 ‘열 번째 봄’ 공연 장면.



어떤 소신이나 의도를 갖고 작품을 연출하나?
남북문화 공감과 교류의 목적이 관객에게 ‘우리는 결국 같이 살기 힘들다’고 느끼게 만드는 게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제대로 알고, 좋은 건 좋고 나쁜 건 나쁘다고 오롯이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북한 주민들을 조금 코믹하게 그리는 것 같다. 가령 “식사했습네까?”라고 말하는데 북한에 그런 말은 없다. 간부가 나오면 차렷 자세를 하는데 그것도 틀렸다. 예의는 갖추지만 모두 평등한데 그런 식으로 오인된 경우가 많다. 많은 동질성을 덮어두고 작은 차이점을 부각시켜서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안타깝다. 북한이탈주민들끼리 모였을 때도 그런 주제의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
문화예술 창작자들의 역할이 중요해보인다.
북한 소재의 작품들이 굉장히 많다. 1년에 30편은 제작되는 것 같다. 시나리오 감수 요청을 받는데 안쓰러운 감정이 들 때가 많다. 열성은 있는데 북한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이탈주민의 창작예술분야 지원에 힘을 써달라고 목소리를 냈다.
창작활동을 원하는 학생이 많다. 그런데 작가, 연출 등 창작활동에 첫발을 디딜 제도적인 시스템이 아직 없다. 현재 현역으로 활동하는 북한 출신 창작예술인은 나를 포함해 네 명이다. 한 끼 먹고 살기 위해서, 취미활동을 위해서 창작을 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시장에서 활동한다. 북한이탈주민 정착지원 정책의 방향성이나 형태도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생존이 아닌 창작예술분야라는 게 신박하다.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 같다. ‘너는 누구고 무슨 이유로 왔니?’라고 물어보면 20년 전에는 답이 정해져 있었다. ‘배고파서 먹고살기 위해서’ 혹은 ‘자유를 찾아서’다. 지금은 아니다. ‘좀 더 사람답게 살아보자’다. 중국보다 한국이 더 좋다는 생각으로 온다. 예전에는 북한이탈주민들이 남한 사회에 정착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취업, 두 번째는 생활환경과 보호막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지금은 중국을 경험했기 때문에 조금 개념이 달라졌다. 나름대로 북한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살아남은 경력자들이다.
북한도 많이 바뀌었을 텐데.
과거에는 지역별로 사람을 구분할 수 있었다. 평양과 그 외 지역이 문화권과 비문화권으로 나뉘었다. 극명한 차이가 있었는데 지금은 감정적인 유통이 되는 것 같다. 지방 친구들이 평양에서 유행하는 것을 시간차 없이 공유한다. 자신의 시간을 만들어서 장사꾼들과 거래해야 나와 내 가족이 먹고살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런 것 때문에 지역별 차이는 많이 사라졌다.
남북문화 교류를 위해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하고 싶나?
북한에서 배우 생활을 10년 정도 했다. 북한 인물 배역을 맡은 배우들을 가르칠 때 완벽한 북한 사람으로 만들어줘야 하는데 한계가 있더라. 북한 출신 배우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들을 위한 연기 육성을 하고 싶다.
연출가로서의 목표는?
한 작품을 제대로 만드는 것이 목표다. 작품이 남북문제에 대한 국민의 인식을 확 달라지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잘 만들고 싶다. 북한 관련 소재 작품들을 보면 너무 황당한 내용이 많은데 북한 공연예술과 한국 공연예술을 다 경험해본 나에게 상의를 해줬으면 좋겠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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