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뜻밖의 위로
'글. 유병숙'

그날 밤 비가 억수로 내렸다. 천둥 번개가 요란하더니 벼락까지 내리쳤다. 자정 가까운 시간에 여동생에게서 카톡이 왔다.
언니, 카펫 팔았어. 바쁜지 오밤중에 가지러 오겠다 함. 엄마네로 총출동. 비에 젖을까 봐 비닐로 꽁꽁 싸매주고. 집 못 찾는다 해서 한참 기다렸어.
아침에 전화로 자초지종을 들었다. “청년 둘이 왔는데 글쎄 번쩍 들어서 차에 싣는 거 있지? 어찌나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지 장한 일 한 것 같았어. 마음이 개운해지더라고.” 동생은 흥분된 어조였다.
당근마켓Daangn Market에 올려놓았던 카펫이 팔렸다. 우중에 애쓴 제부와 조카가 고맙고 안쓰러웠으나 한편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그것은 엄마와 내가 큰맘 먹고 백화점에서 사들였던 거실용 양탄자였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유품 정리하다 포장지에 곱게 싸인 카펫을 발견했다. 십여 년 방치해 두었던 걸 펴보니 우려와는 달리 곰팡이 하나 없이 말짱했다. 언젠가는 우리가 가져갈거라 생각하셨을까? 가슴이 아려왔다. 이제라도 가져갈까? 하자 무거워서 들지도 못하는데, 승용차에 어떻게 싣겠느냐? 며 동생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볼 때마다 슬플 것 같아….” 막내가 말리는데 손들고 말았다. 요즘 유품 정리 대행업체가 생겼다는 소식에도 차마 엄마의 온기를 놓치기 싫어 차일피일 정리를 미루고 있었다. 물건에는 임자가 따로 있다더니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뜻밖에 위로가 되었다.
오래전 일이 어제처럼 떠올랐다. 어느 날 엄마와 외출했다가 불쑥 시댁을 방문하게 되었다. 엄마와 시어머니는 친자매처럼 친연하게 지냈다. 시어머니가 서둘러 빨간색 무늬가 수놓아진 카펫을 마루에 펼쳤다. 거실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우아해졌다. 시어머니 얼굴이 자랑으로 빛났다. 벨기에산 카펫은 얼마 전 막내 시누이가 선물한 것이었다. 너도나도 올라앉으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엄마는 손으로 카펫을 자꾸만 쓸어보셨다.
며칠 후 엄마가 나를 불렀다. 마치 샘을 내듯 다짜고짜 네 시어머니네 같은 카펫, 어디 가면 살 수 있냐고 캐물었다. 하도 보채기에 집 근처 백화점으로 갔다. 엄마는 카펫 매장 앞에 발을 멈추고 물었다.
“빨간색 말고 다른 색깔은 없나요?” 판매원은 카펫을 하나, 하나 넘기며 엄마의 취향에 맞추려고 쩔쩔매었다. 엄마의 들뜬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설마 정작 살 작정인 줄은 몰랐다. 카펫이 뭐라고 저렇게 소녀처럼 설레고 계시는 걸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환해진 엄마의 얼굴은 처음이었다. 나도 덩달아 달뜨고 말았다. 작은 평수 아파트에 어울리지 않게 큰 사이즈를 탐내어도 말리지 않았다. 평생 사치라곤 모르던 양반이 고가품 한 번 사보겠다며 큰소리를 치고 계신다. 그래, 엄마 인생에 한번쯤 객기를 부린들 어떠리. 우리는 초록빛 무늬가 새겨진 카펫을 의기양양하게 주문했다. “폭신하고 따뜻하겠지? 너희들 자주 와라.” 엄마는 한껏 부풀어 있었다.
공들여 사 온 카펫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사건건 문제를 일으켰다. 먼지가 폴폴 일어나니 조심조심 걸어라, 거기다가 국물 엎지르면 어쩌냐, 어찌나 무거운지 다루지도 못하겠다는 둥 엄마의 건짜증이 잦아졌다. 주름살이 늘어날 판이었다. 역시 그때 말렸어야 했다. 후회가 밀려왔다. 엄마와 내가 잠시 탐냈던 고상한 거실은 한바탕 꿈이었을까? “엄마, 그냥 즐기세요. 청소 걱정일랑 마시고. 내가 가끔 와서 청소기 밀어 드릴게.” 해도 마음이 풀리지 않으셨다. 엄마의 카펫 사랑은 결국 파경을 맞고 말았다. 내게 떠넘기려 했으나, 기관지가 약한 남편 때문에 선뜻 들고 오지 못했다. 미국 사는 남동생이 눈독 들였지만 복잡한 운송 절차 때문에 포기했다. 여동생들도 마다했다. 엄마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카펫을 가져간 청년들의 기뻐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무거웠던 마음이 새털처럼 가벼워졌다. 카펫에 새겨진 추억은 그간 찍어둔 사진이면 충분했다. 그리우면 가끔 들여다볼 일이다. 말로만 듣던 당근마켓이 내 생활 속으로 들어와 기쁨을 줄 줄은 미처 몰랐다.





‘당신 근처의 마켓’이라는 이름의 유래처럼 당근마켓은 지역 커뮤니티의 활성화를 목표로 2015년에 출시된 애플리케이션이다. 중고 거래, 구인?구직, 동네가게, 부동산? 중고차 직거래 등 지역 내에서 발생하는 생활정보를 나누고 게시자와 실시간으로 채팅도 할 수 있다. 직거래 방법은 매우 간단했다. 자신이 원하는 물품을 고른 후, 당근채팅으로 거래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상대방을 만나 물품을 교환하면 되었다. 검색해 보니 유용한 물건들이 꽤 많이 올라와 있었다. 딸은 벌써 당근마켓을 통해 아이 용품을 물물교환하고 있었다. 최근 새것과 다름없는 옷을 1,000원에 구입했다며 뿌듯해했다.
오래전 미국 동생네 다니러 갔을 때 경험한 ‘그라지 세일 Grage Sale’이 떠올랐다. 길에 붙여놓은 화살표를 따라가니 차고를 활짝 연 동네 아낙이 물건들을 빼곡하게 진열하고 있었다. 구형 냉장고를 판다고도 했다. 각 물건에는 가격표가 붙어있었다. 올케는 풍경화가 그려진 자그마한 액자를 샀다. 집주인은 손수 수놓은 손수건을 덤으로 주었다. 땡큐! 그녀들이 마주보며 웃었다. 마치 소중한 무엇을 나누어 가진 듯했다.
당근마켓 덕분에 훈훈한 기억들이 새삼 되살아났다. 남이 쓰던 물건을 꺼림직하게 여겼던 마음도 시나브로 사라졌다. 시절 따라 새 인연이 오듯 물건에도 인연이 있었다. 평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는 너무 많은 걸 끌어안고 살아온 건 아닐까 돌아보았다.





그날 오후,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예쁘고, 고맙다는 메시지와 함께 거실에 깔린 카펫 사진이 구입 후기로 올라왔단다. 고맙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사진이 실물보다 멋져 보였다. 동생에게 물었다. 당근마켓에 올려놓은 게 또 무엇, 무엇이냐고. 우리는 상의 끝에 거실용 탁자, 차단스, 서랍장, 냉장고 등 나머지 물건들은 모두 나눔으로 바꿔 올리기로 했다.
연일 엄마의 유품들이 메시지와 함께 사진으로 올라왔다. 사진 속 물품들이 각각 제자리인 듯 의젓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하나 같이 기뻐하는 메시지를 읽다 보니 왠지 내게도 좋은 일이 생긴 듯 흐뭇했다. 추억이 담긴 물건들은 이제 거듭 태어나 새 주인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엄마는 가셨어도 엄마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바쁘다. 적극적으로 나누고 살라고…. 엄마는 아직도 우리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많은 것 같다.

EDITOR 편집팀
유병숙 작가
이메일 : freshybs@hanmail.net
『책과 인생』 등단
한국산문작가협회 명예회장
한국문인협회, 국제PEN 한국본부 회원
한국산문문학상, 에세이스트 올해의 작품상 2회 수상
제12회 한국문학백년상 수상
『충청매일』에 에세이 연재
『조선일보』에 에세이 게재
수필집 『그분이라면 생각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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