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날 위한 꽃은 나도 살 수 있어
'글. 유병숙'

대학로를 걷다 화원 앞에 걸음을 멈춘다. 주황, 보라, 연파랑…. 내가 좋아하는 빨강 장미는 보이지 않는다. 언제 꽃집 꽃들이 몽땅 파스텔 톤으로 바뀐 것일까? 분홍빛 장미를 들여다보다 발길을 돌린다. 아무래도 빨강 장미를 포기할 수 없다.
꽃집은 쉬이 눈에 띄지 않는다. 무심코 지나치던 상가와 골목까지 꼼꼼히 뒤진다. 빨강 장미가 없는 꽃집들이라니! 슬슬 오기가 발동한다. 마침내 길음역 근처 모퉁이에 자리 잡은 꽃가게에서 빨강 장미를 찾아낸다.





우람한 체격의 꽃집 아저씨가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어디 선물하시려고요?” 묻는다. “아니오, 나에게 선물하려고요.” 내 말에 내가 놀란다. 나는 한 번도 날 위해 꽃을 사 본 적이 없다. 문득 마일리 사이러스(Miley Cyrus)의 노래 'flowers'의 후렴구가 떠오른다.
I can buy myself flowers/ Write my name in the sand/ Talk to myself for hours/ Say things you don't understand/ I can take myself dancing/ And I can hold my own hand/ Yeah, I can love me better than/ you can
(날 위한 꽃은 나도 살 수 있어/ 모래 위에 내 이름도 쓸 수 있어/ 나 혼자서도 몇 시간이고 얘기할 수 있어/ 너에게 하지 못한 말을 하면서 말이야/ 춤은 혼자서도 추러 가면 되고/ 내 손은 내가 잡아 줄 수 있어/ 그래, 나도 날 사랑해 줄 수 있어/ 너보다 더)
얼마 전 라인댄스 춤곡으로 'flowers'를 만났다. 강사는 “good에 첫 스텝 시작!”을 매번 강조한다. 노래의 첫 소절 We were good의 good! 을 놓칠세라 귀를 기울인다. 노래가 후렴구에 이르면 강사는 “자존감 높은 가사를 떠올리며 허리를 펴고, 시크하고,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인다. 그뿐만이 아니다. 다른 춤과는 달리 꼭 두 번 반복하여 추게 한다. 마일리의 감미로운 음성이 흐르기 시작하면 괜스레 마음이 설렌다. 나에게 작은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 곡은 마일리가 이혼한 전 남편 리암 헴스워스를 저격한 노래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2009년 영화 「라스트 송」 촬영 때 처음 만난 둘은 헤어짐과 만남을 이어가다 2018년 결혼했지만 8개월 만에 별거에 들어갔고 2019년 12월 이혼했다. 십여 년간 이어진 파란만장했던 연애사에 종지부를 찍은 그녀는 노래로 자신의 의지를 절절하게 전하고 있다.
날 위한 꽃은 나도 살 수 있다는 말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누군가가 챙겨주길 갈망하고 때론 서운해하며 살아온 건 아니었을까 나를 돌아보았다. 벼르고 벼르던 여행길에 나서서도 남을 의식하느라 충분히 즐기지 못했고, 차 한 잔의 여유가 찾아와도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하는 자책감이 끼어들곤 했다. 상대방이 좋아하면 나도 오케이였고 심지어 그걸 나도 좋아한다고 착각하기도 했다. 하고 싶은 일이 떠올라도 언제나 마음뿐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를 위해 꽃을 살 기회는 수없이 많았다. 때마다 기회를 놓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이제 와 나는 변명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특별히 행복했던 시절도, 별나게 불행했던 사연도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아무리 후회해도 지나간 날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과거를 과거로 돌리고 딛고 일어설 때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게 아닐까?

꽃집 아저씨가 꽃다발을 건네주며 “축하합니다.” 힘주어 인사를 한다. 그렇다! 이 꽃은 단순한 선물이 아니다. ‘flowers'에 고무되어 나도 모르게 꽃을 사들었지만 어쩌면 나는 어려운 시절을 지나온 스스로를 축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울컥대는 가슴을 누른다. 나를 사랑하고픈 마음은 굴뚝같지만 아직은 그 방법을 잘 모른다. 나는 서둘지 않고 천천히 배워나갈 생각이다. 서툴게나마 첫발을 내디뎠으니 이제 무엇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상념이 뭉글뭉글 피어오른다.





오늘은 가족을 위해 마련한 6인용 식탁에 나만의 만찬을 차리기로 한다. 걸음이 빨라진다. 언젠가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식탁 중앙에 꽃을, 양 끝에는 은빛 촛대를 올려놓자. 음악이 빠질 수 없다. 비발디의 ’사계‘ 음반을 꺼내 턴테이블에 올려보자. 아끼던 하이얀 접시들을 꺼내고 꽃을 수놓은 냅킨도 반듯하게 접어놓자. 연어 샐러드에 상큼한 소스를 뿌리고, 연하게 구운 스테이크에 과일을 곁들이리라. 달지도, 시지도, 떫지도 않은 최상급 포도주도 한 병 사야겠다. 나는 과감하게 커다란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점찍어 두었던- 딸기에 금가루를 솔솔 뿌려놓은- 케이크의 촛불을 끄리라.
장미꽃 향기가 코끝을 간질인다. 오랜만에 하늘을 올려다본다. 햇살이 온통 나를 향해 쏟아져 내리는 듯하다.

EDITOR 편집팀
유병숙 작가
이메일 : freshybs@hanmail.net
『책과 인생』 등단
한국산문작가협회 명예회장
한국문인협회, 국제PEN 한국본부 회원
한국산문문학상, 에세이스트 올해의 작품상 2회 수상
제12회 한국문학백년상 수상
『충청매일』에 에세이 연재
『조선일보』에 에세이 게재
수필집 『그분이라면 생각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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