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조르바처럼
'글. 유병숙'

조르바가 내게 툭, 말을 건넨다.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일하고 있네.’ ‘잘해보게.’ ‘조르바, 자네 지금 이 순간에 뭐 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해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
머리에 섬광이 지나간다. 조금 전까지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어지러운 생각들이 흩어진다. 자네 지금 이 순간 뭐 하는가? 책을 보고 있네. 오호, 그럼 잘 읽어보게. 조르바의 말투를 흉내 내본다. 어느새 마음이 웃고 있다.
시끌시끌한 소리에 창밖을 내다본다.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며 아파트 마당을 빙글빙글 돌고 있다. 힘차게 페달을 밟고 있는 한 떼의 무리, 무엇이 저토록 아이들을 신나게 하는 걸까?





엄마가 돌아가신 후 웃고 있는 내 모습이 가면처럼 느껴진다. 병마 시달리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았던 엄마는 잠자듯 떠나셨다. 남들은 복(福)이라고 하지만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한 외로운 임종이었다. 산다는 게 온통 허망하게 느껴졌다.
아버지 곁에 묻히는 게 엄마의 마지막 소원이었다. 자명한 일인데도 혹시 우리가 화장할까 봐 전전긍긍하셨다. 한 줌의 재로 흩어지는 게 무섭다고 했다. 27년 만에 두 분은 마침내 해후하셨다. 그간 엄마가 살아낸 신산했던 세월을 합장 무덤이 달래주었을까? 남편과 제부들이 흐느껴 울었다. 아버지, 시아버지, 시어머니, 엄마 네 분으로 이어진 나의 기나긴 간병 생활도 마침내 막을 내렸다.
돌이켜보면 생로병사가 누구에게나 공평할진대 유독 내게만 무겁게 지워진 듯했다. 어찌 된 일인지 시댁 식구들은 모든 간병을 나에게 미루었다. 나중에는 앞장서고 싶어,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했다.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그들의 말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내가 딱하게 여겨졌다. 착하려면 지혜로워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어차피 칭찬받으려고 한 일도 아니지 않은가? 항상 미안하고 고맙다고 했던 부모님들에게 나는 무한 위로를 받았다. 따지고 보면 시누이들 말대로 내가 좋아서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된 일 아닌가.





한시름 놓고 보니 나는 초로의 몸이 되어 있었다. 뭐든 할 수 있는 척, 마음을 야무지게 위장했으나 몸은 생각보다 정직했다. 수많은 병이 내 건강을 파먹었다. 커피 한 잔의 여유도 좌불안석이었다. 내 젊은 시절을 온통 잡아먹었던 시간에 대해 조르바는 뭐라고 할까?
“분명히 해둡시다.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
심장이 미친 듯이 가슴을 두들겨 댄다. 마치 주어진 옷에 몸을 꿰맞추듯 살아낸 나날이었다. 은연중에 나는 나 스스로를 묶어왔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우주의 티끌보다도 더 작은 존재라고 한다. 아웅다웅했던 시간이 아깝다. 나에게 이번 생은 처음이었고 연습은 없었다. 새삼 지금까지의 생활이 기적처럼 느껴진다. 더는 남의 시선에 한눈팔지 말자. 이제부터라도 시간의 주인공이 되자.
부모님 유품을 정리하다 보면 아끼다 쓰지 못한 물건들이 얼굴을 내밀어 안쓰러움이 밀려오곤 했다. 좋은 물건부터 꺼내 쓰기로 한다. 케케묵은 짐들은 술술 처분하고 허허롭게 살 일이다. 동생이 보내온 손수건을 꺼내 그림을 들여다본다. 오리 캐릭터가 “하기 싫으면 하지 말자. 하고 싶은 것만 하자”고 외치고 있다. 어찌 내 마음을 알았을까?





방 안을 둘러본다. 먼지를 수북이 이고 있던 책들이 손을 흔든다. 기쁨이 환하게 불을 켠다. 오롯이 나로 산다는 건 어쩌면 또 다른 모험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조르바처럼 현재에 몰입하는 경지를 맛보고 싶다. 인생의 봄날은 언제나 지금이라고 했던가?
별이 쏟아지는 들판에서 산투르를 치며 춤을 추는 조르바를 떠올린다. “흥이 돌자 그들은 조르바와 산투르를 둘러싸고 자갈돌을 밟으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는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며 전율했다. 내가 찾던 광맥은 바로 이것이구나! 더 무엇이 필요하랴….” 문장이 가슴에 파장을 일으킨다. 켜켜이 쌓아 두었던 가슴의 울분이 허물어진다.
아이들의 웃음이 창을 흔든다. 그들의 유희를 바라보며 아름답다 생각한다. 달리 떠오르는 말이 없다. 더 무엇이 필요하랴!

EDITOR 편집팀
유병숙 작가
이메일 : freshybs@hanmail.net
『책과 인생』 등단
한국산문작가협회 명예회장
한국문인협회, 국제PEN 한국본부 회원
한국산문문학상, 에세이스트 올해의 작품상 2회 수상
제12회 한국문학백년상 수상
『충청매일』에 에세이 연재
『조선일보』에 에세이 게재
수필집 『그분이라면 생각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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