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엽편 소설] 사이버 제사
'글. 박순철'

“아버지 준비 다 되었습니다. 시작할까요?”
“그래, 그러려무나. 그런데 호주도 지금이 아침 시간이냐?”
“아침 이른 시간은 아니고 우리나라 보다 두 시간 빨라요.”
아들 녀석이 컴퓨터를 켜고 분주하게 움직인다. 이내 컴퓨터 모니터에 우리가 차린 제사상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화면이 빙그르르 돌면서 생활한복을 차려입은 훤칠한 키의 장조카와 조카며느리가 등장했다. 이어 장성한 손자들의 의젓한 모습도 보였다. 녀석들 누굴 닮아서 저리 잘 생겼는지. 모니터에 대고 꾸벅 인사를 한다.
“작은할아버지 안녕하세요. 둘째 작은할아버지도 안녕하시고요?”
참 신기한 세상이다. 비행기를 타고도 종일 걸리는 거리에 있는 사람이 어찌 실시간으로 보이는가 말이다.
내가 먼저 제사상 앞에 꿇어앉아 잔을 올리고 두 번 절을 했다. 절을 마치고 일어서니 이번에는 장조카와 손자들의 절하는 모습이 보였다.





번성한 집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형님이 살아계시는 동안에는 우애 있는 집안으로 주위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었다. 밀양 박씨 28대손, 순(淳)자 항렬, 우리 삼 형제는 자주 모여서 술도 마시고 힘들게 보릿고개 넘어온 이야기도 하면서 정겹게 살아왔다.
우리 집안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것은 형님 돌아가시고 나서부터였다. 아주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형님 생존 시에는 모든 일을 형님이 주관하는 대로 나와 동생은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었다. 이제 형님이 안 계시니 그 일을 내가 대신하면서부터 하나둘 불거지기 시작했다. 집안 내력으로 따지자면 장손인 조카가 당연히 그 자리를 물려받아야 하지만 장조카는 이미 호주에 정착하여 어느 정도 기반을 다지는 중이니 국내 일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
10여 년 전에는 우리 삼 형제에게 초청장을 보내와 다니러 간 일이 있었는데 그곳 교포 사회에서 제법 성공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었다. 일주일 동안 극진한 대접을 받긴 했지만, 언어와 문화가 다르고 생각하는 방식이 다른 곳이어서 그런지 그리 기분 좋은 여행은 아니었다.
장조카는 고국에 다니러 오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한번 다녀가려면 그 비용 또한 만만찮으리라. 몇 년에 한 번 사업차 나왔다며 들렀다가는 바삐 들어 가버리니 이제 겉모습만 한국 사람이지 호주 사람으로 봐야 할 거다. 아니 호주 국적을 취득했다고 하니 좀 심한 말로 하면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성싶다.
형님 생존 시에도 조상님 기일이나 명절에 온 가족이 모이면 장조카 이야기가 주요 관심사였다. 당연히 한국에 있으면 장손 노릇을 해야 하지만 외국에 나가 있으니 제사를 지내러 오길 하나 조상 산소에 벌초를 한번 하나, 그 문제를 두고 저희 사촌들 간에도 적잖은 말이 오간 것으로 보였고, 늘 불만이 쌓여 있는 듯했다. 형님께서 아들(장조카)을 올바르게 교육한 덕일 게다. 제사와 벌초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며 제 사촌 동생들에게 가끔 전화도 하는 눈치였다.
명절에 형님댁에 모이면 언제나 우울한 기색을 보이던 형님 내외분이 무척 안쓰러워 보였다. 달랑 남매 낳아서 딸은 출가시키고 하나 남은 아들은 호주에 정착하였으니 양주(兩主)는 외로운 비둘기 같았다. 그렇다고 우리 집이나 동생네 아들 며느리가 소매 걷어붙이고 대들어서 척척 하는, 붙임성 있는 아이들도 아니었다.
형님 돌아가시고 혼자 남은 형수보고 제사를 지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역만리 외국에 나가 있는 장손에게 제사 모셔가라는 소리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생각다 못해 장조카가 국내에 들어오기 전까지 내가 조상님 제사를 받들겠다고 모셔왔다.
그 문제를 두고 우리 집에서는 또 적잖은 논란이 일어났다. 아내는 그러다가 영영 제사를 우리가 모셔야 하는 것 아니냐며 강한 불만을 보였으나 내 서슬에 눌려 이내 수그러들고 말았다. 아들 며느리 또한 드러내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저희에게 그 짐이 넘어올까 봐 은근히 신경 쓰는 눈치였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가까이 있는 자손이 조상을 모실 수밖에. 꼭 장손이 조상을 받들어야 한다는 명문은 어디에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 말이다.
동생과 머리를 맞대고 상의한 결과 조상님 기제사는 한식날 한꺼번에 지내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 내용을 집안에 알리자 모두 환영하는 눈치였다. 다만 연로하신 형수님 혼자 못마땅하신 듯 했지만, 당신 아들이 짊어져야 할 일을 우리가 대신하니 달리 의견 내기가 미안했을 것이다.
집안에서는 보수 중의 보수로 불리던 나와 동생도 이제 시류에 동참하기로 하니 마음이 홀가분했다. 그래서일까만 아이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진 것 같았다. 남 보기 좀 그렇지만 우리 집 아이들이랑, 동생네 아들들도 좋아하는 눈치였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우리 동네 몇몇 집은 벌써부터 기제사는 한꺼번에 지내는 것 같았다.
제사는 그렇게 마무리되었지만, 벌초가 문제였다. 나나 동생이나 이제는 늙어서 예초기 짊어지고 풀 깎을 힘이 없다. 당연히 아들네가 해야 하지만 이 녀석들은 힘든 일 한번 해보지 않았으니 풀 깎을 줄도 모른다. 또 예초기 돌리다가 무슨 사고라도 낼까 봐 걱정되어서 아예 시키지도 못하겠다.
장조카도 벌초하는 데 힘 든다는 사실을 알고는 벌초 비용을 보내왔다. 내가 제일 어른이랍시고 벌초하는 날 비용은 모두 내 차지였었는데 이제 내 주머니 사정이 한결 가벼워졌다. 사실 돈을 보내오지 않아도 도리 없는 일이다. 모두 자손인데 국내에 있는 자손들이 조상 돌보는 거야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그런데 아이들 생각은 달랐다. 사업도 번창하고 종손이면 그만한 값어치를 해야 한다며 뒤로 수군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카가 보내오는 돈 가지고 벌초하는 일꾼 사고 그날 점심 값 내면 끝이었다.





문제는 명절 제사였다. 기제사는 1년에 한번 지내니까 큰 문제 없었지만, 명절 때에는 좀 달랐다. 이 녀석들(내 아들과 조카)이 호주에 있는 저희 사촌 형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하루는 국제 전화가 걸려왔다. 내용인즉슨 제사를 인터넷으로 지냈으면 한다는 거였다. 기가 막혔다. 하지만 다음 말은 나를 현실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멀어서 매번 다녀갈 수도 없는 일이어서 그렇게라도 조상을 모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면서 울먹거리는 데에야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인터넷 제사? 옛말에 ‘귀신 속이듯 한다.’더니 이 녀석들이 그 꼴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주 터무니없는 생각도 아니었다. 외국에 나가서 먹고살기 힘들어 나 몰라라 하는 사람, 또 우리와 다른 외국 풍습이나 문물에 젖어 까마득하게 잊고 살아가는 사람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비록 인터넷이지만 그렇게라도 조상을 모시려 하는 그 마음이 무척 고맙고 가엾게 느껴졌다.
“조상님이시여. 이 못난 후손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제사상 앞에 꿇어앉아 속죄하는 내 마음과는 달리 컴퓨터 모니터에는 녀석들의 웃는 얼굴이 바삐 교차하고 있었다.

EDITOR AE류정미
박순철 작가
이메일 : tlatks1026@hanmail.net
1994년 월간『수필문학』등단
한국문인협회,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수필문학충북작가회장, 충북수필부회장 역임.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현)
중부매일『에세이뜨락』연재(2008∼2011)
충북일보『에세이뜨락』연재(2012∼2013)
충청매일 콩트 연재 (2015∼2018)
충북수필문학상 수상 (2004년)외 다수
수필집『달팽이의 외출』『예일대 친구』『깨우지 마세요』
콩트집 『소갈 씨』
엽편소설집『목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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