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엽편 소설] 조력자
'글. 박순철'

동규가 커피를 마시기 위해 자판기 있는 쪽으로 걸어가자 먼저 와있던 유창이가 커피를 뽑아서 건네준다.
“고마워.”
“에너지 절약 전국 최우수 기관에 선정된 것 축하한다.”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야.”
“네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야. 모두 좋아하고 있어.”
“모두 합심한 덕분이지 뭐.”
“이번에 상금도 많이 나온다고 야단법석이다. 장관 표창장도 받으니 좋은 소식 있을 거야. 기다려봐!”
“나에게만 상을 준다고 해서 거절하고 싶은 생각도 들어.”
“무슨 소리야. 장관 표창 아무나 받는 것 아니야. 움츠리는 개구리가 멀리 뛴다고 사무관은 네가 먼저 달게 생겼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유창이는 총무과에, 동규는 자재과에 근무하고 있다. 둘은 발령 동기이면서도 유창이가 7급을 먼저 달았다. 유창이는 윗사람들의 눈치도 읽을 줄 아는 우수한 두뇌를 가졌고, 동규는 자기 할 일만 철저히 하는 그런 부류의 성격이다.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면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 그 좋은 예가 전기절약이다.
“이 전기 코드 또 김동규 주무관이 뽑았지요.”
“쓰지 않는 코드는 뽑아 놓아야 해요.”
“그걸 누가 몰라요. 가열시키는 시간이 길어지니까 꼽아 놓는 거예요. 제발 앞으로는 코드 좀 뽑지 말아 주세요.”
“네.”





그러나 대답은 그때뿐이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동규는 매한가지였다. 출근하면, 뭐 꼽혀있는 전기 코드 없나 하고 살피는 게 하나의 일과였다. 그러니 어느 때는 복사기 코드를 뽑아 놓아 지청구를 듣기도 했고, 혜영 씨가 충전하려고 꼽아 놓은 핸드폰 충전기를 빼놓아 낭패시키는 일도 있었다.
그 일 말고도 동규에게는 철저한, 이를테면 물 한 방울 버리지 않는 절약 정신이 배어있었다. 집에서 샤워할 때에도 불을 켜지 않는다. 여름철이야 해가 늦게 넘어가니까 괜찮지만, 겨울철에는 깜깜한 목욕탕에서 샤워한다. 비누칠한 것은 어차피 물을 퍼부어야 다 씻겨내려 간다는 논리이다.
출근하기 바쁘게 복도를 돌아다니며 켜있는 스위치를 내리고, 목욕탕이나 화장실 수도꼭지를 점검한다. 때로는 여자 화장실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며 들어갔다가 성추행범으로 몰릴 뻔한 일도 있었다.
한번은 송별회를 마치고 2차를 가기로 되어있었는데 동규는 슬그머니 빠져 집으로 돌아왔다. 먹을 만큼 먹었으면 되었지 더 먹는다는 것은 낭비라는 거다. 그 논리가 잘못이라고 반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정이란 게 있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옛 동료를 생각해서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게 우리 사회의 정이요 미덕이다.
술 취한 상사 부축해서 택시비까지 내어주고 모모동 모모아파트 몇 호 앞에 내려 드리라고 하는 동료들을 멀거니 서서 쳐다보는 동규, 어떻게 보면 우직한 행동으로 보일 수 있으나 아니다. 곰보다는 여우가 낫다는 속담처럼 싹싹한 사람을 좋아하는 사회다.
그런 아들을 바라보는 동규 부모는 탄식이 그치질 않는다. 절약하는 것도 좋고 아끼는 것도 좋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요. 분수가 있게 마련인데 동규에게는 그게 통하지 않았다. 저러다가 장가가는 것도 어려울 것 같았다.
지금 아가씨들, 여왕 떠받들듯 위하고 비위를 맞춰줘도 따라올지 말지 하다. 또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혼도 불사하는 시대다. 그렇게 매우 빠르게 돌아가는 디지털 시대에 코리타분하게 절전 운운하며 코드나 뽑고, 전기 절약한다고 깜깜한 목욕탕에서 샤워하는 사람을 어느 아가씨가 좋아하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동규에게도 사귀던 사람이 있었다. 3년 전 교육행정직으로 근무하다 전입해 온 지영이라는 아가씨와 눈웃음을 주고받고 하더니 점차 가까워지고 만나는 횟수도 잦았다. 그러다가 어느 금요일 오후 동규를 따라 집에 온 일이 있었다.
동규 아버지는 한전에서 간부로 퇴직한 유교사상이 강한 분이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달랐다. 동규 여동생이 남자 친구를 자주 데리고 오자 남편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둘러 결혼식을 올려 준, 시대를 앞서가는 여인이다.





단독주택, 넓은 마당에 심어진 야생화만 봐도 그 집주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영은 그 후에도 가끔 동규네 집을 찾아왔었는데 동규 보다 그의 어머니와 더 죽이 맞는 것 같았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동규의 빛나는 절약 정신은 데이트 중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퇴근길에 지영이와 저녁을 먹기 위해 한식집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처음에는 바닥이 따뜻했었는데 점차 식어가기 시작했다. 지영은 온도가 올라가면 자동으로 내려가는 것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알고 보니 전기 스위치가 동규 등 뒤에 있어서 그가 스위치를 내린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한번은 삼계탕을 먹는 자리에서였다. 어찌나 알뜰하게 살을 발라 먹는지 지영이보다도 더 오래 먹었다. 그러자니 국물은 다 식고 손으로 들고 뜯어먹느라 손에 칠갑하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지영은 ‘이건 아닌데’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더구나 지영이가 남긴 날갯죽지까지 다 발라먹은 다음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국, 지영은 ‘우리 좀 더 시간을 갖고 생각해보자.’라는 말을 끝으로 냉정하게 만나주지 않았다. 몸이 단 동규는 여러 번 전화도 하고 문자도 날렸지만, 허사였다. 일반 전화로도 연결을 시도했으나 동규의 음성이 들리면 가차 없이 끊어버리는 지영이었다. 그러나 딱 한 번, ‘그 지나친 절약 습관 고치기 전에는 전화도 받지 않겠다.’라는 문자가 동규 전화에 찍힌 일이 있었다. 그 충격이었을 거다. 동규는 여자 곁에 가는 것을 무척 꺼리게 되었다. 여자들이 가까이 다가오기라도 하면 얼굴부터 붉어진다. 이제 그 알뜰살뜰하던 절약정신도 확연히 빛을 잃어가고 동규의 어깨도 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동규가 퇴근해 집에 돌아오자 어머니가 싱글벙글 웃으며 가방 하나를 건네준다. 체크 무니 양복, 하얀 와이셔츠에 빨간 넥타이, 구두까지 들어있다.
“공무원은 매사에 조심해야 하고 행실이 발라야 한다. 그리고 출퇴근 때에는 꼭 정장하고 다녀라. 지영이가 골라준 옷이다. 장관상 받는 것 축하한다며 좋아하더라.”
“지영이가요?”
“그래. 이제 너무 절약, 절약하지 말고 살자. 여자들은 그런 소리 무척 싫어한다. 그래야 내수 경기도 살아나고 결혼도 하지.”
“네.”
산마루에 자욱하던 안개가 일시에 사라지듯 동규 얼굴에 가득하던 수심이 그렇게 사라지고 있었다.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지영이를 조종했다는 것은 까마득하게 모른 체.

EDITOR 편집팀
박순철 작가
이메일 : tlatks1026@hanmail.net
1994년 월간『수필문학』등단
한국문인협회,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수필문학충북작가회장, 충북수필부회장 역임.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현)
중부매일『에세이뜨락』연재(2008∼2011)
충북일보『에세이뜨락』연재(2012∼2013)
충청매일 콩트 연재 (2015∼2018)
충북수필문학상 수상 (2004년)외 다수
수필집『달팽이의 외출』『예일대 친구』『깨우지 마세요』
콩트집 『소갈 씨』
엽편소설집『목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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