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엽편소설] 남산제일봉
'글. 박순철'

집에서 같으면 꼭두새벽에 일어나 새벽 운동하러 나가거나 오늘은 무엇을 할까 서성거렸을 소갈 씨가 늦잠을 잤다. 어제 그토록 보고 싶던 가야산 홍류동 계곡에서 노닐다 올라온 달콤함에 젖어서 일게다. 밤새 선풍기를 돌려야 잠을 잘 수 있었지만, 이곳은 에어컨도 선풍기도 필요 없었다.
해인사 관광호텔이 지척에 있었으나 그런 곳을 이용하고 싶은 마음은 꿈에도 없었다. 언젠가 제주도에 갔을 때 딸이 예약해준 호텔에서 부부가 2박 3일 지낸 일이 있었는데 불편하기만 했었다. 아파트로 이사 가자고 조르는 아내의 청을 못 들은 척 주택을 고집하는 소갈 씨를 그래서 고집불통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1, 2층 객실이 20여 개가 넘는 큰 숙소에 손님은 달랑 소갈 씨 혼자였으니 자영업자들의 어려움이 짐작 가고도 남는다. 숙소에서는 식당을 겸하고 있어서 어슬렁거리며 지하식당으로 내려가자 주인아주머니가 부산하게 아침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잘 주무셨어요?”
“네, 시원하게 아주 꿀잠 잤습니다.”
“뭘 해드릴까요?”
“뭐 된장찌개나 해주세요.”
“네, 그런데 왜 혼자 오셨어요?”
“혼자 오면 편하잖아요.”
“설마?”
소갈 씨보다 여남은 살 정도 적어 보이는 안 주인은 붙임성 있고 서글서글해 보였다. 얼마 후 식탁에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를 올려놓는다.
“전에 산악회를 따라서 이쪽 가야산을 등산했던 일이 있는데 어디가 어디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네요.”
“안내 산행을 하셨다면 아마 성주 쪽에서 넘어왔을 겁니다. 여기서 남산제일봉은 약빠른 젊은이들 같으면 한 시간 조금 더 걸리면 올라간다고 해요.”



아득했다. 산을 좋아해서 국내 이름 있는 산은 거의 올라봤다고 자랑하는 소갈 씨이지만 언제 왔었는지 전혀 기억에 없다. 그렇다면 오늘은 남산제일봉이나 올라가 봐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한다.
“여관 뒤로 5분여만 올라가면 가야산에서 경치가 제일 좋다는 남산제일봉 올라가는 등산로 입구입니다.”
소갈 씨는 여관 주인이 일러주는 데로 올라가니 ‘가야산국립공원돼지골탐방지원센터’가 있었고 안내판에는 높이 1,010m의 남산제일봉까지 3km. 1:30분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급할 것도 없고 느릿느릿 계곡을 따라 걷기 시작한다. 성질은 불같아도 이럴 때는 느긋하기 그지없는 소갈 씨!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다. 등산로 옆 계곡에 흘러내리는 물이 청아하기 그지없다. 옷을 벗고 풍덩 뛰어들면 세속에 찌든 때까지 말끔히 씻어 내려갈 것 같지만, 차마 충청도 양반(?)이 그 짓은 할 수 없고 곳곳에 부착된 “수영금지”안내판만 원망스레 바라보는 소갈 씨!
가파른 경사도 별반 없다. 숙소가 해발 600m가 넘는다고 했으니 웬만한 산 하나쯤은 이미 넘은 셈이다. 지대가 높아서 그런지 공기도 무척 상쾌하다. 도토리가 많이 떨어져 있지만 주워갈 생각은 추호도 않는다. 도토리 임자는 이산에 살아가는 야생동물이다. 그들에게 눈총받을 짓은 하고 싶지 않다는 게 소갈 씨 지론이다.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서 그리 힘들지 않다. 조금 험하다 싶은 곳은 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놓아서 오르기도 편하다. 평일이어서 그런지 산을 오르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등산로 옆으로 흘러가는 물을 물병에 가득 채우고 손으로 떠서 마셔보니 그야말로 감로수다. 내려갈 적에 담아서 이곳 여행을 허락해준 아내에게 가져다줄 생각을 해보지만, 과연 잊어버리지 않고 실행할지 모르겠다.
하늘만 빼꼼하던 등산로 앞에 높다란 철제사다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남산제일봉인가 싶어 핸드폰을 꺼내어 사진을 찍는 소갈 씨! 건너편 산봉우리에 걸린 뭉게구름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남산제일봉! 그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철제사다리를 이리 돌고 저리 돌아 힘들게 올라간 남산제일봉! 과연 제일봉이란 이름이 무색지 않을 만큼 일품이었다. 청량사 방향에서 올라온 몇 사람이 이미 정상을 차지하고 사진을 찍고 있다. 휴일도 아닌데 저렇게 젊은 사람들이 이곳에 있을까? 궁금했지만, 그들을 붙잡고 꼬치꼬치 캐물을 만큼 어리석지도, 오지랖이 넓지도 않은 소갈 씨! ‘코로나19 사태가 불러온 억지 휴직이나 휴업, 아니면 휴가를 냈거나’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며 소갈 씨도 정상 표지석을 향해 기념사진을 찍는다.
“사진 찍어 드릴까예?‘
투박한 목소리에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뒤돌아보는 소갈 씨! ‘착각은 자유’라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가 보다.
“아니에요.” 남산제일봉같이 아름다운 산속에서나 살법한 꾀꼬리 같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옆에서 사진을 찍고 있던 아가씨였다. 머쓱해진 사내의 얼굴이 소갈 씨에게로 접근하는가 싶었는데 이내 다른 젊은 여성에게로 향한다. 그 아가씨도 역시 셀카봉을 이용해 남산제일봉을 담고 있었다. 사내의 모습을 탐탁지 않게 여겼는지 고개를 흔든다.
사내는 이미 정상에 올라온 지 한참 된 듯했다. 그가 배낭을 벗어놓은 자리는 일명 포토존에 해당하는 자리가 분명했다. 명당자리에 등산배낭과 물병을 늘어놓고 혼자서 온 듯한 아가씨들에게 선심을 쓰고 있는 모습이 과히 보기 좋지 않았다. ‘나도 혼자 왔는데 뭐야?’ ‘젊고, 예뻐야 하고, 여자이어야 하고, 이 해괴망측한 세상!’ 소갈 씨 심사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소갈 씨가 사내를 흘금흘금 훔쳐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지만 사내는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사내가 등산배낭을 놓은 자리에 올라서서 정상 표지석을 배경으로 하고 찍어야 제대로 된 구도가 잡힐 것 같은데 사내의 배낭이 그곳을 점령하고 있으니 기분 좋을 리가 만무하다. 그 생각은 비단 소갈 씨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 듯했다. 셀카봉으로 사진을 찍던 아가씨들도 신혼부부로 보이는 젊은 팀도 흘금흘금 그 배낭을 훔쳐보는 눈에는 이심전심이 엿보였다.
옛날 같으면 ‘저 배낭 좀 치웁시다.’하고도 남았을 것이지만, 이제 그런 만용을 부릴 용기가 없으니 정말 소갈 씨 처량해 보인다. 소갈 씨가 목이 타는지 배낭에서 물병을 꺼내어 마시다가 사내의 배낭을 향해 “에취” 하며 물을 뿜어낸다.
“아이고, 이거 어느 분 배낭입니까? 제가 사리가 들려 물을 쏟았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며 물기가 흐르는 배낭을 손수건으로 대충 닦으며 배낭 옆에 있던 물병을 들어 한쪽 나무 밑으로 옮기는 소갈 씨의 손길이 분주하다.
“남의 배낭에다 물을 쏟으면 어떡해요?”
사내의 볼멘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미 사내의 배낭은 치워진 다음이었고 그 틈을 이용해 재빠르게 예의 포토존에 올라 사진을 찍는 아가씨들의 모습은 싱그럽게만 느껴졌다.
‘역시 젊음은 좋은 것이여!’ 탄식인지 독백인지 모를 말이 소갈 씨 입에서 흘러나와 남산제일봉에 흩어지고 있었다.

EDITOR AE류정미
박순철 작가
이메일 : tlatks1026@hanmail.net
1994년 월간『수필문학』등단
한국문인협회,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수필문학충북작가회장, 충북수필부회장 역임.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현)
중부매일『에세이뜨락』연재(2008∼2011)
충북일보『에세이뜨락』연재(2012∼2013)
충청매일 콩트 연재 (2015∼2018)
충북수필문학상 수상 (2004년)외 다수
수필집『달팽이의 외출』『예일대 친구』『깨우지 마세요』
콩트집 『소갈 씨』
엽편소설집『목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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