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엽편소설] 퇴직금
'글. 박순철'

“대표님 안녕하세요. 대명빌딩에서 관리팀장으로 근무하던 박 소갈입니다.”
“아! 네. 팀장님,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상대방은 이미 소갈 씨의 용건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딴청을 피운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고,”
“그것 때문에 전화하셨죠?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그럼 언제까지?”
소갈 씨는 미덥지 않은 듯 재차 상대방을 자극한다.
“이번 달 말일까지 해드리겠습니다.”
“대표님 그 말씀 믿겠습니다.”
수화기 폴더를 닫으면서도 속마음은 부글거린다. 퇴직한 지 3개월이 지났는데 아직도 대표는 매번 다음, 다음, 하면서 퇴직금 지급을 미루고 있다.
소갈 씨가 청춘을 바친 회사에서 정년퇴직하고 놀고 있을 때 지인이 빌딩 관리팀장 자리가 나는 데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물어왔다. 노는 것도 지겹고 마땅히 소일거리도 없던 참이어서 무척 고마웠다.



경리 업무를 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아래 한글과 엑셀을 할 줄 알고 조금만 노력하면 할 수 있는 업무였다. 한가지, 2급 소방안전관리자 자격증이 있어야 했는데 소갈 씨는 회사에서 소방업무를 담당한 경험이 있기에 쉬 채용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관리팀장 업무는 소갈 씨에게 꿈과 활력을 주었다.
몇 푼 나오는 국민연금 가지고는 생활비가 빠듯했다. 노후 자금을 축내지는 않을까 마음졸이고 있었는데 무척 다행한 일이었다. 근무처도 걸어서 30분 거리였다. 바쁜 일이 없고 날씨가 좋으면 걸어 다니며 ‘룰루랄라’ 콧노래를 불렀다.
주차요원과 미화원이 있어서 그들과 함께 건물을 관리하는 일이었고, 전기 수도 검침해서 관리비 부과 징수 및 납부하는 업무였다. 입주민이 협조를 잘해 주어서 큰 어려움 없이 2년이 흘러갔다. 업무도 몸에 익고 소리만 들어도 빌딩 돌아가는 상황을 훤히 꿰고 있을 즈음 빌딩 입주자와 건물관리 업체와의 계약이 종료되었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회사가 지금의 (주)성광이었다. 빌딩 입주자 대표는 관리비를 한 푼이라도 줄이기 위해 관리업체 공모에서 금액을 가장 적게 써낸 (주)성광의 손을 들어 준 것이다.
관리비를 어디에서 줄일까? 전 회사에서는 주 44시간 근무였는데, 이번 (주)성광에서는 14시간을 줄인 30시간 근무였다. 당연히 봉급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전에는 2백만 원 가까이 되던 급여가 150만 원으로 줄어들었다. 물론 관리팀장인 소갈 씨 혼자만이 아니고 주차요원과 미화원까지 줄줄이 급여가 줄어들었다.
소갈 씨 자신은 저축해놓은 약간의 돈도 있고 나이도 많으니까 그만둬도 큰 문제 될 것은 없지만, 주차요원과 미화원은 생활이 녹녹지 않은 듯했다. 더구나 주차요원을 없애고 대신 무인 수납기를 설치한다는 (주)성광 사장의 말에 소갈 씨는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일자리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던 주차요원의 근심 어린 표정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아서다. 팀장 자리라도 내주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지만, 주차요원은 컴맹이어서 그럴 수도 없었다. 미화원은 어쩔 수 없이 줄어든 임금을 받고서라도 근무하겠다고 했고 소갈 씨도 그 나이에 어디 새로운 직장을 구할 수도 없을 것 같아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눌러앉기로 마음을 정했다.
처음 몇 달은 어수선했다. 더구나 주차요원이 떠난 자리는 많은 어려움을 불러왔다. 아무리 기계가 우수하다 해도 사람의 모든 일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소갈 씨가 책상에 앉아서 업무를 보다가 어느 때는 뛰쳐나가 입차, 또는 출차를 제대로 하지 못해 쩔쩔매는 방문자들을 도와주어야 했다.
새로운 방식으로 업무를 개선해서 불필요한 업무를 줄이겠다고 약속한 (주)성광 대표의 약속은 공염불에 불과했다. 그리고 소갈 씨를 힘들게 하는 것은 제때 업무 지원이 되지 않는 점이었다. 전기, 수도, 전화, 인터넷 등 모든 명의가 종전 관리 회사 명의로 되어있어 하루빨리 명의변경 해 줄 것을 여러 번 요구했지만, 그때마다 대표는 알았다고 말만 해놓고선 실행에 옮기지 않아 업무에 적잖은 지장을 주었다.
신생 회사여서인지 업무도 미숙하기 짝이 없었다. 관리비 고지서가 나가면 빌딩 입주자들에게 바로 세금계산서를 발행해 주어야 하는데 그 일도 제대로 처리되지 않아 입주자들의 전화를 몇 차례씩 받아야 해서 그야말로 왕짜증이 나는 날도 허다했다.



급여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전임 회사에서는 말일에 어김없이 급여를 지급해주어서 어려움이 없었는데 이 회사에서는 제때 급여를 주지 않으니 각종 공과금이나 보험료 납부 등 모든 게 꼬여가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입주자 대표에게 그 일을 보고하고 매달 본사 (주)성광으로 보내는 관리비에서 급여를 공제하고 송금하기로 했다.
사업주는 근로자의 4대 보험 가입이 의무인데 업체가 바뀐 지 석 달이 지나도록 가입해주지 않았다. 만일 근무 중에 사고라도 났다면 꼼짝없이 본인이 해결해야 했을 생각을 하면 아찔했다. 이번에도 입주자 대표의 닦달에 5개월이 지난 후에야 과태료를 내고 가입해 준 업체 대표였다.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힘들여 땅을 파고 등짐을 날라도 정해진 규칙에 따른다면 불평할 어떤 이유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아니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되는 법, 더구나 근로자의 임금을 깎아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회사에서는 더 일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늘그막에 취직 잘했다고 친구들에게 가끔 막걸리도 사곤 했었는데 이제 그 꿈을 접기로 했다. 관리업체 바뀌고 억지로 1년을 버티고는 미련 없이 사표를 내고 말았다. 앓던 이 빠진 듯 시원했다.
퇴직한 지 5개월이 지나도록 퇴직금을 주지 않자 더는 참지 못하고 고용노동부에 민원을 제기했다,
“처벌을 원하십니까?”
딸 같은 고용노동부 청주지청 근로개선지도과 직원이 소갈 씨에게 묻는다.
“아무리 그래도 옛날 주인인데…. 처벌은 아닙니다.”
“의외군요. 하지만 ‘임금 체불 노동자 지원제도’라는 게 있어요. 사업주가 오면 제가 ‘체불 임금 등?사업주 확인서’라는 것을 받을 거예요. 그 서류를 법률구조공단에 제출하시면 공단에서 먼저 퇴직금을 지급해드리고 사업주에게 구상권을 청구하는, 그런 방법도 있으니 생각해 보세요.”
조금 늦게 도착한 ㈜성광 대표는 다음 달 15일 날 꼭 주겠다고 약속하고 직원이 내민 서류에 자필 서명을 마친 후에야 청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토록 퇴직금 지급을 미루던 업체 대표도 고용노동부가 무서웠는지 이번에는 약속을 정확하게 지켰다. 소갈 씨는 그 돈을 찾아서 아직도 일자리를 찾아다니며 노모 병간호에 열중하고 있는 주차요원의 집을 향해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받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 퇴직금이었으니….’

EDITOR AE안은하
박순철 작가
이메일 : tlatks1026@hanmail.net
1994년 월간『수필문학』등단
한국문인협회,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수필문학충북작가회장, 충북수필부회장 역임.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현)
중부매일『에세이뜨락』연재(2008∼2011)
충북일보『에세이뜨락』연재(2012∼2013)
충청매일 콩트 연재 (2015∼2018)
충북수필문학상 수상 (2004년)외 다수
수필집『달팽이의 외출』『예일대 친구』『깨우지 마세요』
콩트집 『소갈 씨』
엽편소설집『목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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