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엽편소설] 청탁
'글. 박순철'

주머니를 모두 뒤집고 차 안을 샅샅이 찾아도 없다. 이젠 나도 늙었나 보다. 아니, 치매가 서서히 나를 갉아먹으며 들어오고 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불안이 엄습해왔다.
오늘 태평마트에서 쇼핑하고 물건값을 내려고 지갑을 찾았으나 없었다. 종종 있는 일이기도 하다. 전에는 전화기를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 끙끙거리는데 냉장고 안에서 벨이 요란하게 울린 일도 있었다.
한번은 가스레인지에 된장을 끓이려고 불을 켜놓고 연속극을 보고 있었다. 극에 심취하여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무언가 눈앞에 연기 같은 게 보여 아차 하고 부엌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냄비보다도 더 걱정되었던 것은 불이었다. 조금만 늦게 발견했다면 우리 집을 화마에게 내줄 뻔했다.





집안에 웅크리고 있는 청국장 냄새 몰아내느라 무진 애를 써야 했다. 또 신랑한테 지청구는 얼마를 받았는지, 그날 이후 우리 집 출입문을 비롯한 벽 곳곳에는 ‘가스 조심’이라고 빨간 글씨로 인쇄한 스티커가 붙여졌다. 외출하다가 그 문구를 보면 다시 들어가 제대로 잠겨 졌는지 확인하고 외출한다.
아, 그런데 지갑은 아무리 찾아도 없다. 혹 엉뚱하게 사용되지는 않았는지 조처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우선 카드 정지부터 시켜야지, 그런데 카드가 몇 개였지? b카드, k카드. h카드. 그 외에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우선 b카드사부터 연결했다. 그런데 무슨 놈의 본인확인 절차가 그리 복잡하단 말인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어렵사리 상담원과 연결은 되었는데 성질 급한 사람은 숨넘어가기 딱 맞을 정도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직 사용된 흔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럼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거야,
휴대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여보세요, 김말숙 위원장님 되시나요?”
“네, 제가 김말숙인데요.”
“지갑 잃어버리지 않으셨어요?”
“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지갑 찾느라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
약속 장소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그곳에는 나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저, 지갑 가지고 계신 분이신가요?”
“네, 제가 주웠어요.”
“고맙습니다. 이 은혜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요.”
지갑을 건네받아 안을 살펴보았다. 별 이상이 없는 듯했다. 하긴, 지갑에 손댈 사람 같았으면 연락하지도 않았겠지. 그나저나 사례는 해야겠는데, 어느 정도를 해야 할지 난감했다. 지갑에 큰돈이 들어있진 않았지만, 카드를 사용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쩨쩨하게 몇만 원을 건네주기도 그렇고 해서 어디 가서 저녁이나 먹자고 했더니 흔쾌히 대답한다.
내가 잘 가는 한식집 거구장으로 가자고 했다. 마침 그곳에 볼일도 있어서 잘 되었다 싶었다. 식당 안은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한산했다. 거구 정식 2인분을 시켰다.
“저 명함을 보니까 금성초등학교 운영위원장님으로 되어있던데 지금도 그 일을 하시나요?”
“네, 사실 여러 번 사양했으나 학교 측에서 하도 사정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다시 맡게 되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사실 운영위원장이라는 자리가 보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명예가 따르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들 공부하는데 지장 받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자리라 생각하고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좋은 일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봉사라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인품과 어느 정도의 재력이 동반되지 않고는 어렵다고 생각해요.”
“잘 아시는군요. 하지만 저에게는 지성도, 재력도 없으니 그저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요.”
“너무 겸손하시네요.”





처음 만난 사람치고는 대화가 술술 풀려나갔다. 같은 여자이니 서로 공감하는 부분도 많았고 별 어려움도 없었다. 나이는 나 보다 두 살이 적었다. 어찌나 살가운지 앞으로 ‘언니’로 부르겠다며 자주 만나자며 적극적이었다. 거절할 이유도 없고 해서 그러자고 했다.
가을이 시작되면서 학교 일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강당 신축 공사를 비롯한 건물 전체 도색까지 협의할 일이 자꾸 늘어났다. 그때마다 운영위원장이라는 직함에 충실하기 위해서도 협의 안건에 대해서 꼼꼼히 챙겨야 했으나 내 성격이 원래 덜렁거리다 보니 찬찬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린다. 낯선 번호다. 받지 않기도 그렇고 해서 받아보니 전에 지갑 찾아준 그 여자였다.
“언니, 저에요. 오늘 저녁 약속 없으면 저녁이나 같이했으면 해요. 제가 맛있는 것 사드릴게요”
식당에 도착하니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반갑게 맞으며 호들갑을 떤다.
“그래 어떻게 지냈어요. 바빠서 전화도 못 했어요.”
“아휴, 언니 그냥 편하게 하세요. 나이도 어린 사람한테.”
“그래도 어떻게….”
“부탁이 있어서 만나자고 했어요.”
“무슨? 나한테 그런 힘이 있을까?”
“언니, 소심하긴, 요즘 학교 공사 많이 한다면서요?”
“응 그런가 봐, 그런데?”
“우리 신랑이 도색업자예요. 지난해에는 대전에 있는 큰 공사를 따서 잘했는데 올해는 일을 못 했어요.”
“공사 발주는 학교에서 하는데….”
“알아요. 하지만 언니가 운영위원장이니까 그만한 힘은 발휘할 수 있잖아요?”
“그런 부탁 해보지도 않았고 어떻게 하는지도 몰라요.”
“아휴, 언니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도와줘요”
“어려운 사정이야 이해가 되는 데 그런 부탁을 해보지 않아서….”
지난번 지갑 찾아준 부담 때문에 거절하기가 난감했다. 그렇다고 청을 들어주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르는 것 같았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남에게 신세 진 일은 부지기수이지만 부당하게 신세 진 기억은 없다. 더구나 청탁이라니….
남편 얼굴이 떠올랐다. 말단 공무원이지만 성실하게 살아온, 그의 사전에 청탁이란 말은 없다. 언젠가 그이의 승진 문제를 선배 언니한테 알아본다고 했을 때 불같이 화를 내던 사람이다. 결국, 사무관을 달지 못하고 얼마 남지 않은 퇴직을 기다리는 남편이다. 마음 편하게 정년을 맞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도 부당한 청탁은 들어 줄 수 없을 것 같았다.
“미안합니다. 그런 청은 들어줄 수가 없습니다. 대신 뒤늦은 감은 있지만, 지갑 찾아준 보답이라 생각하시고 받아주세요”라고 쓴 메모지와 함께 상품권 한 장을 그의 가방에 넣어두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EDITOR AE류정미
박순철 작가
이메일 : tlatks1026@hanmail.net
1994년 월간『수필문학』등단
한국문인협회,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수필문학충북작가회장, 충북수필부회장 역임.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현)
중부매일『에세이뜨락』연재(2008∼2011)
충북일보『에세이뜨락』연재(2012∼2013)
충청매일 콩트 연재 (2015∼2018)
충북수필문학상 수상 (2004년)외 다수
수필집『달팽이의 외출』『예일대 친구』『깨우지 마세요』
콩트집 『소갈 씨』
엽편소설집『목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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