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가이드

2023~2024 한국관광 100선
미로 같은 골목 과거를 배경으로 새로운 시간들이 덧입혀진 곳
'서울 서촌마을·익선동'

무심코 지났던 길을 다시 보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인다. 같은 풍경도 새롭게 다가온다. 5월의 햇볕으로 풍성해진 초록을 배경으로 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서울 한복판, 왕복 8차선 도로를 채운 자동차들이 바쁘게 내달리는 경복궁역 대로에서 몇 걸음, 서촌 골목에 들어서면 시간의 흐름이 갑자기 느려지는 것을 느낀다. 낮은 한옥 사이로 미로처럼 이어지는 골목에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며 또 다른 서울의 시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서촌 골목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도시의 소음과 멀어진다.



2022년 5월 10일 청와대 개방 이후 청와대 앞길과 서촌마을 일대는 외국인 관광객에게 ‘K-관광 1번지’로 자리 잡았다. 청와대 개방 2주년을 맞은 5월 둘째 주말, 서울 종로구 서촌마을 일대를 제대로 둘러보기로 마음먹고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 도착했다. 지하철역 입구부터 한복을 차려입은 외국인들이 붐볐다. 경복궁역 4번 출구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마주하는 골목들 중 어느 곳으로 들어서도 서촌마을에 닿는다.
서촌마을은 경복궁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 오랜 시간 골목을 지켜온 작은 상점들과 한옥이 즐비하다. 이곳에선 목적지를 딱히 정하지 않아도, 길을 잃어도 괜찮다. 골목을 걷다 보면 자연스레 또 다른 골목으로 이어지고 낯선 골목마다 전혀 뜻하지 않은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다. 서촌 골목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도시의 소음과도 멀어진다. 습관처럼 꽂은 이어폰을 잠시 빼뒀다. 멀리서 자동차 경적소리가 간간이 들려올 뿐 새소리가 골목을 메웠다.

해질 무렵 서촌 골목의 낭만을 찾아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다.(사진. C영상미디어)



서촌마을은 조선 시대 역관이나 의관처럼 전문직인 중인들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현존하는 한옥 대부분은 1910년 이후 추진된 주택계획에 의해 지어진 도시형 한옥이다. 좁은 땅 위에 ‘ㄱ’ 혹은 ‘ㄷ’ 자의 평면 형태로 작은 마당을 감싼 형태다. 개조·증축된 일부 한옥은 공방이나 게스트하우스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주민들이 실제 생활하는 거주지이기 때문에 내부를 함부로 들여다보거나 고성을 지르는 행위는 삼가야 한다.
서촌마을은 화가 이중섭, 시인 윤동주·이상 등 근대 문화예술가들이 활동했던 지역이다. 그 흔적이 여전히 골목 구석구석에 깃들어 있다. 대표적으로 ‘오감도’의 작가 이상(본명 김해경, 1910~1937)의 집을 들 수 있다. 이상은 세 살 때부터 20여 년간 이곳에서 살았다. 이상이 살던 집(서울 종로구 자하문로7길 18)은 현재 이상의 작품을 기억할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통유리로 꾸며진 문을 밀고 들어가면 한쪽 벽면에 전시된 아카이브가 보인다. 이상의 소설과 수필, 그림, 서신 등이 연대순으로 분류돼 있다. 이상의 작품집과 해설서들도 있어 그를 좋아하는 독자에겐 선물 같은 공간이다.
이상의 집에서 5분 거리에는 붉은 벽돌의 옛 교회 건물이 있다. 페인트로 투박하게 적힌 ‘체부동 성결교회’란 글씨가 돋보인다. 체부동 성결교회는 1931년에 세워져 90년 넘게 서촌 골목길을 지켜왔다. 서울시 우수건축자산 제1호로 2018년 ‘서울생활문화센터 체부’로 재탄생해 공연 연습실, 마을 카페 등 시민들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익선동에는 디저트 카페, 고깃집, 맥줏집 등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는 한옥 상점들이 밀집돼 있다. (사진. 한국관광공사)


경복궁 담장 따라 거닌 청와대 앞길
골목 곳곳, 과거를 배경으로 한 트렌디한 식당, 카페, 갤러리도 또 다른 볼거리다. 전혀 다른 시간들이 겹쳐진 풍경은 드라마·영화 촬영지로도 인기다. 드라마 ‘상어’, 영화 ‘건축학개론’ 등의 배경이 됐고 가수 아이유의 ‘꽃갈피’ 앨범 배경으로도 알려져 K-팝을 사랑하는 외국인 관광객의 발길을 불러들인다. 서촌마을 초입에 있는 헌책방 ‘대오서점’은 6·25전쟁 직후 문을 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책방이다. 지금은 카페를 겸한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골목을 빠져나와 효자로에 선다. 경복궁 서쪽 담장을 따라 청와대로 이어지는 큰 길이다. 좌우로 울창한 나무들이 줄지어 있다. 시원한 그늘이 반가운 계절에 어울리는 곳이다. 중간중간 야외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속바지부터 버선, 속치마, 머리 장신구 등 완벽하게 차려입은 외국인 관광객을 보는 것도 흥미롭다. 1㎞가 채 되지 않는 구간 끝엔 청와대가 맞아준다. 여기서부터 경복궁 북문을 끼고 삼청로로 이어지는 810m 구간을 ‘청와대 앞길’이라고 부른다. 과거 청와대의 기자 회견장이었던 춘추관이 보이면 청와대 앞길의 끝이 가까워진 것이다. 곧바로 버스를 탈 수 있지만 걷기를 권한다.
오랜 한옥과 현대식 분위기의 조화
청와대 앞길 끝에서 걸어서 20분 거리, 종로구 익선동에서는 조금 더 현대화된 한옥을 만날 수 있다. 성인 두 명이 스칠 듯 지나야 하는 좁은 골목은 인파로 북적였다.
익선동은 2018년 한옥보전지구로 지정된 이후 2019년부터 ‘레트로’, ‘뉴트로’ 열풍과 맞물려 서울 속 ‘시간 여행지’로 떠올랐다. 서촌마을과 마찬가지로 골목과 한옥의 정겨움이 매력으로 꼽히지만 서촌마을보다는 화려하다. 주거 목적의 한옥보다 디저트 카페, 고깃집, 수제 맥줏집, 셀프사진관, 타로점집 등 개성을 뽐내는 가게들이 몰려 있기 때문이다. 기발한 아이디어의 간판 구경만 해도 흥미롭다. 간판이 아예 없는 곳도 있고 액자가 떨어졌나 싶어서 보면 가게 간판인 곳도 있다. 부쩍 늘어난 루프톱 식당에서 내려다보는 익선동 전경도 색다르다.
익선동에서 지하철 종로3가역으로 이어진 골목 끝은 ‘맛집’을 찾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이른바 ‘갈매기살 골목’으로 통한다. 고기 굽는 냄새와 연기로 가득 찬 가게마다 빈자리를 기다리는 대기행렬이 길게 늘어섰다. 지나가는 외국인들은 이런 광경이 흥미로운 듯 사진을 찍느라 바쁘다.
익선동은 본래 철종의 생부인 전계대원군의 사저 ‘누동궁’ 자리였다. 1920년대 부동산 개발업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정세권이 일본인들의 종로 진출을 막기 위해 한옥 단지를 만든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그는 익선동 땅을 매입한 뒤 작게 나눠 66㎡(20여 평) 미만 규모의 한옥을 다닥다닥 만들어 조선인들에게 분양했다고 한다.
태양이 물러나는 시간, 익선동의 주변 풍경은 낮과 전혀 달라진다. 익선동과 맞닿은 낙원동에 ‘야장(노상에 테이블을 펴두고 장사하는 식당)’이 늘어서고 젊은 세대부터 장년층까지 순식간에 자리를 채운다.
익선동 탐방은 마음 가는대로 골목을 누비는 방법을 추천한다. 이미 걸었던 길을 다시 걸어도 매번 새롭다. 고개를 조금만 들면 익선동을 둘러싼 고층 빌딩들이 보인다. 빌딩 숲 가운데서 그 시대에 맞는 방법으로 살아남은 익선동은 계속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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