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청주를 수호해 온 우암산의 문화유산 3부
'다시 찾은 보물 - 청주의 문화유산'

‘다시찾은보물’은 2023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시리즈로 청주의 문화자원을 6개 테마로 구분하여 글, 그림, 사진으로 엮은 책입니다. 문화유산, 역사인물, 숲길산길, 예술인, 교육유산, 미래유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 편에서는 ‘1권: 문화유산’을 게재합니다.
Cheapter4-3. 청주를 수호해 온 우암산의 문화유산
청주시 상당구 수동 산33번지에 있는 목우사지(牧牛寺址)는 상당공원에서 우암산 남쪽 계곡을 따라 오르다보면 초입의 오른편에 위치한다. 도로 오른편에 오래된 축대가 보이는데 이것이 목우사지의 대지를 이루었던 석축이다. 길이 약 50m, 높이 3∼8m의 석축 위에는 평지를 이룬 1천 평 정도의 밭과 민가가 있는 곳이 조선후기의 각종 지리지에 빠짐없이 나타나는 목우사(牧牛寺)의 옛터이다. 우암산의 많은 절터들 가운데 유일하게 문헌기록을 갖고 있는 곳이다. 지금은 주변이 모두 밭으로 변하고 주택이 들어서 있어 절터의 유구는 남아 있지 않고 주변에서 기와편 등의 유물이 발견될 뿐이다.
목우사에 대해서는 『여지도서』를 비롯한 『호서읍지』, 『청주읍지』 등에 목우암(牧牛菴)이 와우산에 있다고 하였으며, 『충청도읍지』에는 고을 동쪽으로 5리 되는 와우산에 있다고 하여 절 이름을 ‘목우암’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여지도서』의 청주목 방리조에는 목암(牧菴)이 청주 관문(官門)에서 북쪽으로 7리에 있는데 편호(編戶)는 8호로 남자 13인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방향과 거리에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모두 목우사를 지칭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이밖에 『여지도서』에 수록된 「청주목지도」와 전남 구례군 운조루에 소장된 『여지도』에 수록되어 있는 「청주읍성도」 및 「서원지도」에 와우산 남쪽 기슭에 자리하는 목우암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이와 같이 우암산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목우사가 언제 없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1890년경에 간행된 『청주군읍지』에도 목우암이 나타나고 있어 당시까지 향불이 밝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대략 구한말의 격변기 내지는 일제강점 초기 무렵에 절이 없어지지 않았을까 추측될 뿐이다. 왜냐하면 1923년에 간행된 『청주연혁지』에 청주의 명승고적으로 와우산을 소개하면서 ‘옛날에는 목우암이라고 부르는 한 채의 불당이 있었지만 지금은 폐허가 되어 한 조각의 초석도 남아 있지 않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1923년에는 이미 절이 없어지고 폐허가 되었음을 알려준다.

목우사지 석축의 일부




목우사지는 많은 와당들이 출토되고 있으며 문양도 다양하다. 이곳에서 출토된 보상화문(寶相華文) 수막새는 가장자리에 연주문이 돌려져 있고 그 안에 커다란 4잎의 보상화문을 배치하였다. 보상화의 사이에는 작은 간판이 있고 씨방을 돌기시켜 그 안에 8개의 연자를 배치했다. 4개의 보상화는 선이 굵으며 꽃잎 안에는 인동초와 이름 모를 꽃들이 장식되어 화려하다. 이밖에 연화당초무늬·도깨비무늬 수막새와 당초무늬 암막새 등이 있는데 이들과 동일한 양식의 와당들이 운천동사지에서도 발굴된 바 있어 같은 기와가마에서 공급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절터의 서편 건물지에서 수습된 ‘천력이년(天歷二年)’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암막새는 이 절의 중건시기를 알려주는 유물로서 문헌자료가 절대 부족한 이 사지의 연혁을 밝히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기와는 당초무늬와 함께 예서체 글씨를 양각하였는데 천력(天歷) 2년은 고려 충숙왕(忠肅王) 16년(1329)에 해당되어 이때에 기와를 다시 올리는 공사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 많은 기와 파편과 해무리굽을 갖춘 청자 조각들이 출토되고 있어 당대의 영화를 짐작케 해준다.
목우사지에서 출토된 석조여래입상은 2002년 가을에 우암산의 동쪽 기슭인 용담동 봉황사로 옮겨졌다. 그 동안 목우사지 맞은편의 목암사에 봉안되어 있던 이 석조여래입상은 머리 부분이 결실되어 있었는데 봉황사로 이전하면서 새로 머리를 조각하여 올려놓았다. 목에는 부처님의 후덕함을 보여주는 삼도가 뚜렷하게 조각되었고 법의는 좌우통견으로서 양팔을 감싸고 흘러내려 무릎부분에서 좌우대칭이 되도록 둥글게 처리되었다. 가슴 밑에 나비 모양의 군의(裙衣) 매듭이 보이고 수인은 가슴 앞에서 오른손바닥이 보이도록 펼쳐서 들고 있는 모습으로 전법륜인을 표현하려 한 것 같은데 이러한 수인은 입상에서는 보기 드문 것이다. 근래에 보강한 머리 부분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조각수법이 유려한 작품이다. 조성 시기는 고려 중엽으로 보는 설도 있으나 원래의 모습을 완벽하게 간직하고 있는 목 이하의 조각양식을 살펴보면 통일신라시대의 전통을 잘 계승하였고 조각 기법도 수준급이다.

목우사지 석조여래입상



나는 이 불상이 목우사지에서 사라진 몇 년 동안 도난을 당했거나 외지로 팔려 나간 것으로 알고 무척 아쉬워했는데 엉뚱하게도 용담동에 새로 지은 봉황사에서 가져간 것이었다. 그리고 봉황사에서 ‘봉황사 석불입상’으로 문화재 지정을 신청하였는데, 나는 명칭을 원래의 위치인 목우사지를 명시하도록 강력히 주장하여 ‘목우사지 석조여래입상’으로 변경하고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70호로 지정하였다. 지금은 봉황사도 주인이 바뀌고 사찰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어 보존 대책이 필요한 실정이다. 어쨌든 이 불상은 청주지역에서는 시대도 앞서고 작품성도 뛰어나서 우암산의 상징이 될 만하다.
우암산 서쪽 중턱 시내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자리한 관음사(觀音寺)는 1943년에 창건된 사찰로 많은 유물이 출토되는 옛 절터이기도 하다. 출토 유물 가운데는 ‘계향지사(桂香之寺)’, ‘월고사(月姑寺)’등의 글씨가 새겨진 기와들이 있어 주목되는데 ‘계향지사’명 기와는 흥덕사지에서도 출토된 바 있어 이 절터가 ‘계향사’ 혹은 ‘월고사’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주변에서는 통일신라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시기의 기와편이 다수 발견되고 있어 대략 사찰의 존폐시기를 짐작하게 해준다. 관음사에서 주목되는 유물은 무쇠 가마솥 즉 철확이다. 이 가마솥은 1958년에 발견되어 절에서 관리하고 있었으나 부식으로 심하게 파손되자 지금은 어디엔가 숨겨두었는지 폐기시켰는지 보이지 않는다. 박물관에 기증하여 보존처리를 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마솥의 크기는 높이 60cm, 지름 133cm, 두께 2.8cm로 보은 속리산 법주사에 있는 가마솥이나 충남 논산의 개태사에 있는 가마솥보다는 작으나 이곳 절터의 규모에 비하면 대단히 큰 것이다. 이 가마솥을 통하여 이곳에 있던 옛 절은 지금보다도 고려시대에는 더욱 많은 신도를 가졌던 중요한 불교도량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가마솥의 형태는 계란을 반으로 자른 모양의 반구형으로 맨 위의 입술부분 즉 구연을 밖으로 둥글게 말아서 모서리를 부드럽게 처리하였으며 그 아래로 전이 붙은 형태이나 발견 당시에 이미 모두 떨어져 나가 있었다. 그밖에 가마솥이 발견된 밭 일대에서 고려 초기의 토기와 청자 조각들이 발견되고 있어 당시의 영화를 짐작케 한다. <4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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