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근대역사기행
철도의 변화가 가져 온 번영과 쇠락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

경북 영주시는 철도 교통의 요충지이다. 영동선의 분기역이자 경북선의 종착역이며 중앙선의 주요 경유역이다. 당연히 철도는 영주시의 발전과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영주역이 처음 들어섰던 영주시 영주동은 한동안 번영을 누리다가 영주역의 이전으로 급속한 쇠락을 겪었다.
철도 덕분에 웃고 철도 때문에 울다
1936년 일제는 경성과 경주 사이를 남북 방향으로 종단하는 중앙선(당시 경경선) 철도의 부설 공사를 시작했다. 한반도의 자원 수탈과 병력 수송을 위한 철도였다. 중앙선 철도는 1939년 청량리~양평 구간이 처음 개통됐다. 그 뒤로 1940년에 양평~원주, 1941년에 영주~안동 구간이 잇달아 개통되었고, 1942년에는 전 구간이 개통됐다. 1941년 보통역으로 시작한 영주역은 당시 영주읍내에서 가장 번화했던 중앙통 근처에 자리 잡았다. 역 주변의 중앙통에는 곡식, 포목, 땔감, 옹기 등을 파는 각종 상점뿐만 아니라 여인숙, 술집 등의 유흥업소가 우후죽순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영주 구도심의 중심 도로인 광복로 일대 풍경


철도 교통의 요충지인 영주를 거쳐 가는 여객과 물동량은 광복이후에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1955년에 철암, 황지, 장성 등 삼척 남부지역의 탄광 개발과 무연탄을 수송하기 위한 영암선(영주~철암, 1963년 영동선으로 통합) 철도가 완공되었기 때문이다. 1966년에는 경북선 철도의 예천~영주 구간도 개통되었다. 마침내 3개의 철도 노선이 영주에서 ‘열 십(十)’자로 만나게 된 것이다. 영주역이 들어선 영주동 일대는 늘 많은 사람으로 북적거렸고, 상점마다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다. 특히 경북 문경, 강원도 삼척과 정선 일대의 탄광에서 필요한 자재와 물품을 공급하던 영주의 상인과 사업가들이 엄청난 부를 이뤘다. 영주역 주변에서는 ‘개들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1961년 7월 11일에 영주읍내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수재(水災)를 겪었다. 새벽부터 줄기차게 쏟아진 폭우로 영주읍내를 관통하는 서천의 제방이 무너진 것이다. 영주읍내 3분의 2가량이 물에 잠겼고, 주민 14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재민도 15,319명이나 발생했다. 구불구불한 서천의 물길을 반듯하게 펼치는 직강(直江) 공사에 700여 명의 군 공병대가 투입됐다. 이후 도로가 확장되거나 새로 개설되었고, 영주읍내를 통과하는 중앙선 철도도 직선으로 고쳐졌다. 새로운 시가지의 탄생과 함께 영주 읍내의 중심이 영주동에서 휴천동으로 이동했다. 휴천동에는 1967년 새로운 영주역이 완공되었고, 영주읍이 영주시로 승격된 1980년에는 영주시청이 휴천동에 자리 잡음으로써 구 영주역 일대의 쇠락은 가속화되었다.

左)영주 유일의 고딕양식 건물인 영주제일교회 右)고풍스러운 겉모습과 달리, 실용적이고도 현대적인 분위기의 영주제일교회의 내부


예스러운 정취를 즐기기에 더없이 좋다
영주시에는 근대역사문화거리를 포함해 모두 8점의 국가등록문화재가 있다. 그중 부석면 소재지에 위치한 부석교회 구 본당을 제외한 7점이 영주시 영주동에 분포한다. 영주역에서 가장 가까운 영주제일교회부터 들러봤다. 이 교회는 1909년에 영주교회로 처음 설립됐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계몽운동을 전개하거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6.25전쟁 당시 건물이 불타는 바람에 전쟁 직후인 1954년부터 신도의 노역 봉사로 건축 공사가 시작됐다. 1958년 지금과 같은 고딕양식의 건물이 완공됐다. 장중하고 고풍스러운 겉모습과 달리, 교회 내부는 현대식 구조로 꾸며져 있다.
영주제일교회에서 서쪽으로 불과 100여 m 거리에는 1940년경 세워졌다는 풍국정미소가 있다. 도시 한복판에 위치한 정미소가 다소 생소하다. 하지만 풍국정미소가 위치한 광복로 일대를 비롯해 영주읍내에는 한때 30여 곳의 정미소가 성업했다고 한다. 1966년부터 반백 년 동안 풍국정미소를 운영해 온 우기섭 씨는 2016년에 정미소를 폐업했다. 그는 “영암선 철도가 개통된 뒤로 강원도 탄광지대의 수많은 사람이 먹을 곡식은 대부분 영주에서 공급됐기 때문에 영주읍내 정미소와 싸전(쌀과 그 밖의 곡식을 파는 가게)들이 엄청 큰돈을 벌었다”라고 옛 시절을 회상했다. 문이 굳게 닫힌 풍국정미소에는 지금도 옛 건물과 도정시설 등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다.

01.90여 년의 역사를 면면히 이어 온 영광이발관 02. 빈집으로 남은 영주동 근대한옥의 계자난간
03. 한때 영주역장이 살았던 구 영주역 7호 관사 04. 관사골 골목길의 벽화. ‘개들도 돈을 물고 다녔다’는 전성기를 묘사했다


풍국정미소에서 다시 서쪽으로 60m쯤 걸어가면 영광이발관 앞에 도착한다. 1930년대에 국제이발관으로 시작해 시온이발관을 거쳐 영광이발관으로 남아 지금까지 90여 년의 긴 역사를 이어 오고 있다. 1970년부터 영광이발관을 운영 중이라는 이종수 씨는 “옛날 영주역 때는 역을 드나드는 사람이 꼭 거쳐 가는 길목에 있어서 늘 손님들로 북적거렸지만, 지금은 수십 년 된 단골만 간간이 찾아온다”라며 영화롭던 옛 시절을 그리워했다.
영광이발관에서 150m 거리에 위치한 영주동 근대한옥은 조선 명종 때의 소문난 명의였던 이석간(1509~1574)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 오는 곳이다. 이석간이 중국 명나라 황제 어머니의 불치병을 고쳐주자 황제가 99칸 집을 이곳에 지어줬다는 것이다. 99칸 집의 본채는 오랜 세월 속에 사라졌고, 1929년에 중수된 별채만 여태껏 남았다. 앞면 7칸, 옆면 6칸 규모의 이 근대한옥은 한때 한의원, 하숙집 등으로 사용됐다가 지금은 비어 있다.
영주동 근대한옥은 이른바 ‘관사골’의 초입에 위치한다. 철탄산 서쪽 자락에 자리한 이 마을에는 옛 영주역 철도원들의 관사가 많아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내부 공간의 구성과 외관의 형태, 구조와 재료가 비교적 잘 보존된 구 영주역 5호 관사와 7호 관사만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전형적인 일본식 목조주택인 관사 2곳은 애초 중앙선 철도 부설공사에 참여한 기술자들의 숙소로 지어졌다. 영주역장이 살았던 7호 관사는 현재 비어 있고, 5호 관사에는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새 주인이 살고 있다.
영주동의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와 관사골 일대는 휴일 한낮에도 한산했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자분자분 걸으며 오래된 거리의 예스러운 정취를 즐기기에 더없이 좋다. 관사골 일대의 옛 시절을 추억하는 벽화를 꼼꼼히 감상하며 걷다가 관사골 언덕에 전망대처럼 자리 잡은 카페에 앉아 오래도록 봄볕을 즐겼다.

EDITOR AE류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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