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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천년고도 속의 오롯한 조선 마을 경주 양동마을
'양동마을의 세 보물 이야기'

경주 양동마을은 드넓은 안강평야 동쪽에 봉긋이 솟은 설창산과 성주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560여 년 전부터 월성(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가 함께 터를 잡은 동족마을이다. 150여 채의 기와집과 초가가 옹기종기 들어앉은 이 마을은 1984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2010년에는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한국의 역사마을'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설창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경주 양동마을 전경. 왼쪽에 안강평야의 일부도 보인다.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의 동족마을이 된 까닭
시린 삭풍이 옷섶을 파고드는 날에 경주 양동마을을 찾았다. 한두 번 둘러 본 곳이 아닌데도 마을 초입에 들어설 때마다 초행길처럼 낯설고 막막하다. 마을 구조가 독특해서 동선을 미리 가늠하기 어려운 탓이다. 양동마을은 북쪽의 설창산(163m)과 남쪽의 성주산(109m) 사이에 있다. 설창산 문장봉에서 ‘말 물(勿)’자 형태로 흘러내린 산자락과 네 골짜기에는 오랜 풍상을 묵묵히 견뎌 온 고택이 듬성듬성 보인다. 안골, 거림, 물봉골, 하촌, 갈구덕 등으로 구역이 나눠지는 양동마을에는 130여 가구 240여 명이 산다. 전체 면적이 969,115㎡에 이를 만큼 넓고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고택도 많아서 마을 구석구석을 한 번에 둘러보기란 쉽지 않다.
양동마을을 처음 방문한 사람은 초입에 위치한 양동마을문화관부터 둘러보는 것이 좋다. 마을의 역사, 고택의 내력과 특징을 한눈에 보여주는 자료가 다양하게 전시돼 있다. 이곳의 전시자료만 꼼꼼히 읽어봐도 양동마을 답사 여행의 동선을 계획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양동마을은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가 사이좋게 공존하는 동족마을이다. 월성 손씨 가문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은 풍덕 류씨 류덕하의 외동딸과 혼인한 양민공 손소(1433~1484)가 처가 마을인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부터였다. 여강 이씨의 입향조인 찬성공 이번(1463~1500)도 손소의 딸과 혼인해 이곳에 살기 시작함으로써 여강 이씨 동족마을로 발전했다.

左)청백리로 유명한 우재 손중돈의 옛집인 관가정 右)양동마을 월성(경주) 손씨의 입향조인 손소 초상(보물, 영인본)


양동마을의 세 보물 이야기
매표소를 지나서 마을 안에 들어서면 맨 먼저 관 가정(보물)과 향단(보물)이 눈에 들어오니 발길도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하게 마련이다. 둘 다 ‘물봉 동산’이라는 높은 언덕에 올라앉았다. 이 마을의 높은 곳에는 대체로 ‘ㅁ’자 모양의 큰 양반집이나 종택이 있고, 그 아래 낮은 곳에는 ‘가랍집’으로 불리는 노비의 집이나 하인 집이 위치해 있다.
관가정은 조선 중종 때의 청백리로 유명한 우재 손중돈(1463~1529)의 옛집이다. 스무 계단 남짓의 돌계단을 올라 대문에 들어서면 ‘관가정’이라는 현판이 걸린 사랑채를 마주하게 된다. 관가정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는 정자’라는 뜻으로, 그 이름과 잘 어울리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바로 앞에는 양동마을의 서쪽을 휘감아 흐르는 안락천 물길이 보이고, 그 건너편으로는 광활한 안강평야(양동마을 사람들은 ‘양동평야’라고 한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북쪽을 제외한 삼면의 조망이 시원스럽다. 손님과 제사가 많은 집이라서 그런지 사랑채 대청마루도 유난히 넓다. 사랑채 앞에 비스듬히 누운 향나무 고목 두 그루가 관가정의 녹록지 않은 역사를 말해 준다. 관가정은 양동마을의 고택 가운데서는 드물게도 안채까지 둘러볼 수 있다.
향단은 조선 전기의 대학자이자 훗날 동방18현 중 한 사람으로 문묘에 모셔진 회재 이언적(1491~1553)의 옛집이다. 회재가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했을 당시에 병환 중인 노모를 돌보라면서 중종 임금이 하사한 집이다. 하지만 회재가 한양으로 올라간 뒤로는 동생 이언괄이 이 집에 살면서 형 대신 노모를 모셨다. 양동마을에서 가장 큰 정자인 심수정(국가민속문화재)은 벼슬도 마다하고 노모를 모신 이언괄을 추모해서 1560년경에 처음 세워졌다. ‘향단’이라는 집 이름은 이언괄의 손자인 이언주의 호이기도 하다. 여느 양반집과 사뭇 다른 구조를 갖춘 이곳은 주거의 편의성을 중시해 행랑채, 안채, 사랑채를 모두 한몸체로 붙였다. 그러면서도 안마당과 행랑마당은 각각 따로 뒀다는 점도 이 집만의 특징이다.

여강 이씨의 종택 별당인 무첨당. 소나무 그림자도 예스럽다.


양동마을에는 회재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된 집이 향단 말고도 또 있다. 물 봉골 중간쯤의 중턱에 자리 잡은 무첨당(보물)이다. 이 집은 이언적이 고향에 잠시 내려와서 지었다는 설과 아버지인 이번이 1510년경에 처가인 송첨 종택에서 분가하면서 지었다는 설이 있다.
여강 이씨 종택인 무첨당은 ‘口’자 모양의 살림집인 안채, 이언적 내외의 신주를 모신 사당, 별당인 무첨당 등 3채의 건물로 구성돼 있다. 그중 보물로 지정된 것은 별당 하나뿐이다. 무첨당은 이언적의 장손인 이의윤의 호이기도 하다. ‘훌륭한 조상에게 한 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 건물은 대갓집 종손이 손님 접대, 문중회의, 학문 수련, 제사 등의 목적으로 사용해 왔다. 옛날에는 늘 사람들로 붐볐을 무첨당의 안팎이 지금은 한적하다. 인적 뜸한 마당에 드리워진 소나무 그림자가 유난히 크고 또렷해 보였다.

左) 송첨종택의 사랑채인 서백당과 '양동의 향나무' 右) 농한기에는 초가지붕에 이엉 얹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다.


‘양동의 향나무’와 ‘경주개 동경이’
무첨당을 나와서 송첨종택으로 향했다. 월성 손씨의 큰 종가인 송첨종택은 안골 깊숙한 곳에 있다. 가는 길에 초가지붕의 이엉 얹는 광경을 목격했다. 까마득한 소싯적에 봤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니 괜스레 반갑고 마음까지 뭉클해졌다. 송첨고택(국가민속문화재)은 양동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고택이다. 양민공 손소가 혼인한 지 2년뒤인 세조 5년(1459)에 집을 지어 처가에서 분가 했다고 한다. 아들인 손중돈과 외손자인 이언적도 이 집에서 태어났다.
송첨종택의 사랑채에는 ‘서백당(書百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참을 인(忍)자를 100번 쓰며 인내심을 기른다’는 뜻이다. 사랑채와 안채는 하나로 이어졌는데, 그 사이에 반담을 쌓았다는 점이 이채롭다. 사랑채 옆 축대에는 양민공이 이 집을 처음 지은 기념으로 심었다는 ‘양동의 향나무’가 서 있다. 보기 드물 정도로 밑동이 굵고 잘가꿔진 분재처럼 부챗살 모양으로 펼쳐진 수형(樹形)도 준수하다. 남다른 위엄과 기품을 갖춘 향나무이다.
송첨종택에서 마을 조망이 시원스럽다는 근암고택(국가민속문화재)을 찾아가는 길에 상춘헌고택(국가민속문화재)의 바깥주인과 함께 산책길에 나선 경주개 동경이를 만났다. 낯선 사람을 만났는데도 경계하거나 짓지 않고 오히려 반가워했다. 사람을 좋아하고 사냥을 잘한다는 동경이는 경주지방의 토종개로 종 자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언뜻 우리나라의 진돗개나 일본 시바견을 닮은 듯하지만, 꼬리가 매우 짧아서 쉽게 구별된다. 한때 양동마을에서는 정책적으로 적잖은 동경이가 길러졌지만 지금은 몇 마리 남지 않았다고 한다.
양동마을에는 조붓한 오솔길과 산길, 정겨운 돌담길과 시원한 대숲길 등이 실핏줄처럼 뻗어 있다. 길에서 만나는 느낌과 풍경이 다채로워서 잠시도 지루할 틈이 없다. 마을 구석구석을 제대로 돌아보려면 하룻밤 묵는 것이 좋다. 바닥이 뜨겁고 공기는 서늘한 온돌방에서 보내는 하룻밤도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추억이다.

EDITOR AE류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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