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역사를 짓다
조선조 왕실 건축의 완결
'보물 수원 화령전 운한각·복도각·이안청'

1800년 6월 조선 22대 왕 정조(正祖)가 승하했다. 이듬해 4월 수원 화성행궁 곁에 정조의 초상화를 모신 건물, 화령전(華寧殿)이 들어섰다. 마치 세상을 떠난 왕이 이 도시를 지키기 위해 초상화로 다시 나타난 것 같은 일이었다. 화령전의 정전을 운한각(雲漢閣)이라고 이름 지은 사람은 왕위를 이은 아들 순조(純祖)였다.

수원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

왕을 모시듯 어진을 모시는 집 운한각
운한각은 임금의 글씨나 시문을 모신 집이라는 뜻이다. 순조를 비롯한 역대 임금이 수원에 오면 반드시 이곳에 와서 어진(御眞)*에 술잔을 올리고 절을 했다. 어진을 모신 건물은 마치 살아 계신 왕을 모시는 듯한 격식과 정성으로 지었다. 화령전 건물은 크게 네 구역으로 나뉘었는데, 앞쪽은 출입문 마당을, 가운데는 초상화를 모신 운한각을, 왼편에는 절하는 사람이 머무르는 재실(齋室)을, 오른쪽에는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典祀廳)을 두었다. 정전 구역 뒤편에는 작은 숲을 조성해 배후림(背後林)을 이루도록 했다. 제사를 지내는 건물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시설을 명쾌하게 위치를 잡아 배열한 모습이 돋보인다.
한층 돋보이는 부분은 정전과 주변 건물인데, 정전의 왼편에 이안청(移安廳)을 두고 두 건물을 복도각(複道閣)으로 연결했다. 이안청은 정전을 수리하는 등 무슨 일이 있을 때 어진을 잠시 옮겨 모시기 위해 마련한 집이고, 복도각은 정전에서 어진을 내갈 때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통로이다. 우리나라 건물에서 복도각이라는 이름이 나타나기는 화령전이 거의 처음이다. 이전에 왕실에서 국장을 당하면 시신을 안치한 빈전(殯殿)이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 앞에 직각 방향으로 배설청(排設廳)이라는 통로시설을 설치한 사례가 있었는데, 이를 상설 시설로 마련한 것이 복도각이다. 화령전 이후 복도각은 19세기 왕실 건축의 가장 이색적인 시설로 자리잡았다.
운한각 내부도 눈길을 끈다. 가운데 뒤편으로 내합이라고 하는, 어진을 모신 정교하게 꾸민 작은 집이 마련되었다. 내합 앞에는 절을 올리는 대청이 넓게 열리고 양옆으로는 익실(翼室)을 두어 정조가 쓴 글씨나 사용하던 기물, 서책을 모셔 두었다. 본래 내합과 익실 바닥은 온돌을 들여 습기를 막도록 했지만 고종(高宗, 재위 1863~1907) 연간에 모두 마루로 바꾸었다. 지금도 건물 밖에는 온돌 아궁이 흔적이 내합 뒤와 좌우 익실 기단에 남아 있다.

左) 운한각 내부에 마련된 내합 右) 운한각과 이안청을 연결하는 복도각

조선조 건축 기술이 집약된 왕실 건축
운한각 건물은 반듯하게 다듬은 장대석으로 기단을 높이 쌓고 그 앞에 월대를 마련해 절을 올리는 의식에 대비했다. 주춧돌은 반듯한 정사각형 위에 둥근 주좌를 두어 어느 궁궐 못지않은 품격을 갖추었다. 기둥의 굵기나 간격도 안정감 있는 비례를 갖추고 창방이나 익공(翼공) 같은 부재까지 모두 가지런하다. 서까래는 반듯하면서 끝으로 가다가 살짝 면을 쳐낸 솜씨가 돋보인다. 건축 세부 하나하나가 마치 조선 후기 목조건축의 교본을 보는 듯하다. 한국 건축의 특색 중 하나로 자연을 닮은 구부러지고 휜 서까래를 들기도 하지만, 여기서 보는 서까래는 그와 달리 정연한 한국 건축의 진면목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화령전을 지은 목수 우두머리는 전후창이라는 사람인데, 내수사(內需司)에 속한 당대 최고 경력을 지닌 기술자 중 한명이었다. 그는 1789년 사도세자의 묘소를 옮길 때 관을 싣는 가마를 제작하는 책임을 맡았고 화성 축성 때에도 오래 일했다. 건축 일도 잘했지만, 제사와 관련한 기물 제작에 재능이 남달랐다. 운한각의 내합 바닥은 온기가 잘 올라오도록 정교하게 짠 살평상(살平牀)**을 깔았고 문짝도 세밀한 가공이 일품인데, 이런 부분에서 전후창이 솜씨를 발휘했다. 석공 우두머리였던 김성진 역시 사도세자의 묘소와 화성 축성에서 활약한 금위영(禁衛營) 소속의 경력자였다.
조선시대 목조건축은 18세기에 와서 장인의 노임제도가 안정되고 사용하는 연장이 다양해지면서 기술이 향상되어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축적된 기술을 집약해서 조성한 것이 사적 수원 화성이었으며 화성 축성은 수많은 기술자가 자신의 기량을 연마하고 발휘할 수 있는 기회였다. 화성 축성 5년 후 같은 수원에서 왕실이 지은 화령전은 비록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화성 축성에서 갈고 닦은 솜씨를 마음껏 승화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다. 수원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을 조선 왕실 건축의 결정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어진(御眞): 임금의 초상화
** 살평상(살平牀): 바닥에 좁은 나무오리나 대오리의 살을 일정하게 사이를 두고 박아 만든 평상

EDITOR AE류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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