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길 위에서 보물 찾기
이 땅을 지킨 민초의 길
'강화도, 왕가의 길'

반만년 역사가 깃든 한반도, 오랜 역사만큼이나 이 땅을 노리는 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우리 역사에서 전쟁을 빼 놓을 수 없는 이유이다. 이 땅을 지킨 수많은 사람. 그들의 꿈은 한결같지 않을까. 이 땅을 반드시 자자손손 지키라는. 그 바람에서 비롯된 것이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쌓아 만든 요새, 즉 성이다. 강화도에서 이 땅을 지킨 산선을 마주한다.
강화에서 고려의 흔적을 찾다
강화도는 한반도의 역사를 응축해 놓은 축소판이다. 반만년의 세월 동안 강화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시기가 고려 시대이다. 그 당시 강화도는 ‘강도’로 불리며, 고려의 수도 기능을 했었다. 고려궁지를 비롯해 왕릉, 성곽 등이 아직 남아 있는 이유이다. 하지만 우리 역사 속에서 고려는 조선에 비해 인식은 물론이고 비중도 매우 낮은 편이다. 고려의 수도인 개성이 북녘땅인지라 접근 자체가 어려운 탓이다.
이 같은 열악한 환경에도 다행히 강화도에 고려의 역사 흔적을 따라 걷는 길이 조성되어 있다. ‘강화도 나들길’이 그 것인데 이 길은 화남 고재형 선생이 1906년 강화도의 유구한 역사와 수려한 자연을 노래하며 걸었던 강화의 길을 걷기 좋게 재구성한 길이다. 현재 20개 코스가 개발되어 있으며 총거리는 310.5km에 이른다. 그 가운데 제15코스 ‘고려궁 성곽길(11km, 소요 시간 4시간)’은 강도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항전의 시작, 강화산성
지금으로부터 800여 년 전, 우리 역사가 커다란 위기에 처했던 때가 있었다. 한반도에 침입한 몽골에 맞서 고려가 40여 년간 항전한 것이다. 그 당시 최고 집권자 최우가 이끄는 무신정권은 고종 19년(1232) 장기전을 대비해 도읍을 개경에서 강화로 옮겼다. 이로써 강화는 원종 11년 (1270) 개경으로 환도하기까지 38년간 강도로 불리며 임시수도가 됐다. 강화천도는 결정과 함께 빠르게 전개됐다.
천도가 결정된 다음 날부터 강화에 궁궐과 관아 등 시설을 짓기 시작했다. 천도 후 2년이 지나자 강화의 모습은 급격히 변했다. 궁궐과 여러 관청은 물론이고 국립 교육기관인 국자감과 역대 고려왕의 위패를 모신 태묘까지 세워졌다. 개경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점차 수도다운 면모를 갖춰 간 셈이다.
대몽 항전을 위한 산성은 흙으로 쌓았다. 내성·중성·외성 으로 이루어졌으며, 내성은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읍에 있는 성이다. 그 당시 약 9km에 이르렀다는 중성은 내성을 지키는 성이었고, 외성은 몽골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강화 동쪽 해안을 따라 쌓았다. 이 외성을 통해 육지로부터 물자를 지원받기도 했다. 강화산성은 고려가 몽골과 화친하면서 내성을 시작으로 외성과 궁궐까지 모두 헐렸다. 이후 조선 전기에 내성이었던 강화성을 돌로 다시 쌓았으나 1637년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다시 헐리는 비운을 맞았다. 그후 조선 숙종 3년(1677)에 성을 보수하면서 규모를 크게 넓혀 쌓았다.
左)인천광역시 기념물 강화 정족산 사고지(江華 鼎足山史庫地) 右)강화산성 북문 성곽

성곽이 에두른 군사 요새, 강화도
고려궁 성곽길은 강화산성 남문에서 출발한다. 축조 당시 강화의 내성은 흙으로 축성했다. 이후 조선 숙종 37년 (1711) 강화유수 민진원이 허물어진 내성을 읍성으로 고치면서 문을 만들고 안파루라 했다. 성곽을 따라 계절을 노래하는 신록과 지붕 낮은 마을 풍경이 정겹다. 무성한 숲길을 지나면 사적 강화산성 남암문을 마주한다. 문루가 없는 비밀 출입통로인 암문은 전시 때 성안에 필요한 물품 등을 운반하거나 비밀 작전을 수행하는 통로로 사용하기도 했다. 강화산성에는 4개의 암문이 있었으나 남은 것은 남암문뿐이다.
남암문을 지나면 비탈진 성곽을 따라 오른다. 성곽 정사부에 오르면 강화읍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 너머에 드넓은 평야까지 아득하다. 길은 장군의 지휘소인 남장대에 닿는다. 강화산성에는 남산과 북산에 각각 남장 대와 북장대, 서문 안에 서장대가 있었으나 모두 허물어졌다. 2010년 남장대만 복원됐다. 날씨가 화창한 날 남장대에 서면 김포의 문수산을 비롯해 북녘땅 개성까지 또렷하게 보인다고 한다. 대몽 항전을 위해 개경을 버리고 강화에 터를 잡은 고려인들의 탄식이 들리는 듯하다. 내친김에 개경이 좀더 가까운 북문으로 잰걸음을 옮긴다.
북문은 축성 당시 누각이 없었다. 현재 진송루라는 현판이 붙은 누각은 조선 정조 7년(1783) 강화 유수 김노진이 세웠다가 전쟁으로 부서졌던 것을 1977년에 복원했다. 성곽을 따라 오르면 북장대 터를 알리는 표지판만 남아서 개경을 향해 덩그러니 서 있다. 기대했던 것처럼 남장대보다 개경이 한결 가깝게 느껴진다. 고성능 관측 망원경이라도 있다면 북한 주민들의 얼굴도 또렷이 보일 정도이다. 북문을 내려선다. 길은 어느덧 사적 강화 고려궁지로 향한다. 이 길은 매년 봄날 화사한 벚꽃이 만개해 춘심을 자극하기로 유명하다. 벚나무엔 초록 잎사귀가 무성해져서 벚꽃 엔딩조차 상상할 수 없지만,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한가로운 강화읍의 풍경과 남산의 남장대는 계절과 상관없이 또렷하다.
궁궐이 있던 고려궁지의 전각들은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할 때 모두 허물어졌다. 이후 조선시대에 행궁이 들어서기도 했지만 지금 남은 것은 동헌, 이방청, 외규장각 정도로 고려의 흔적은 없다. 오랜 세월의 풍파를 거치면서 예전의 모습을 잃어버렸지만, 고려궁지가 뿜어내는 아우라는 궁지로서 손색이 없다. 우선 병풍처럼 펼쳐진 송악산이 궁지를 에워싸고 있어 아늑하다. 외규장각 뒤편 송악산 기슭에 올라 옛 궁궐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左)강화산성 동문 망한루 右)용당돈대

자연의 너른 품에 안긴 강화 삼랑성
강화도에 단군의 세 아들이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깃든 사적 강화 삼랑성이 있다. 강화산성에 비해 낯선 성이다. 정족산(222m)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아 정족산성으로 더 잘 알려진 이 산성은 전등사를 품고 있다.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때 창건한 유서 깊은 고찰이다. 절에 가려면 산성의 남문이나 동문을 지나야 한다. 이 절의 정문이 삼랑성 남문인 셈이다.
삼랑성 축성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토성이었던 것을 자연석으로 고쳐 쌓은 것을 봐서 삼국시대에 만든 성으로 추측한다.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몇 차례 개보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문은 규모가 꽤 크고 위엄 있는 누각도 세워져 있다. 성곽을 따라 깃발이 꽂혀 있어 용맹스러운 기개가 느껴진다. 남문을 지나 곧장 직진 하면 전등사로 이어지고 성문을 지나 오른쪽 비탈을 오르면 삼랑성을 한 바퀴 돌 수 있다. 둘레가 3km 남짓해 한두 시간이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는 거리이다. 남문을 지나서 동문으로 향하는 구간이 경사가 가파르지만 나머지 구간은 수월하다.
강화읍에 있는 강화산성이 다소 분주하게 흘러가는 역사의 시간이라면, 삼랑성은 자연의 품에서 느릿느릿 흘러가는 역사의 시간을 보는 듯하다. 돌맞이 고개에 이르자 온 수리 일대를 비롯해 강화도 동쪽 일대와 김포까지 아스라 이 눈에 담긴다. 고개를 내려서자 누각이 없는 반원형으로 생긴 작은 홍예문, 동문에 닿는다. 그 아래에 ‘양헌수 승전비’가 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양헌수 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비이다. 비각에서 내려가면 전등사 경내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전등사에는 보물 약사전을 비롯해 문화재를 상당수 보유하고 있다. 그중 ‘정족산사고지’가 있다. 조선 현종 1년(1660) 마니산 사고에 보관 중이던 『조선왕조실록』을 삼랑성이 있는 정족산 사고로 옮기고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을 지었다. 외적의 침입을 막을 만한 안전한 곳으로 판단한 이유에서이다. 현재 건물은 1998년 복원한 것이다.
돈대와 돈대 사이를 걷다
강화외성은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이 교차해 서해와 만나는 지점인 동쪽 해안에 설치됐다. 강화도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수도인 개경, 한양과 모두 가까워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특히 바다에서 내륙 어디로나 통할 수 있는 수로가 있기에 더욱더 그렇다. 이점을 간파한 조선은 한양을 지키는 전초기지로 섬 전체를 아우르는 동서남북 해안 전역에 5진 7보 53돈대를 만들고 외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강화나들길 제2코스 ‘호국돈대길’은 강화도와 김포 사이로 흐르는 염하강을 따라 돈대와 돈대를 이은 길이다. 갑곶돈 에서 출발해 초지진까지 총거리는 17km, 6시간 정도 소요 된다. 길에서 마주하는 돈대. 말 없는 성벽에서 항쟁의 외침이 들리는 것 같다. 그 소리는 다름 아닌 용틀임을 하며 밀려오는 염하강의 파도의 소리이다. 출발지인 사적 강화 갑곶돈은 고려가 대몽항쟁을 펼칠 때 왕궁을 방어한 외성 으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였으며, 훗날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곳이다. 갑곶돈에서 발걸음을 옮기자 염하강의 갯벌이 벗이 된다.
용진진에 포함된 용당돈대로 향한다. 잠시 숲길을 지나자 해안으로 돌출된 용당돈대를 마주한다. 돈대 아래에 염하강이 유유히 흐르고 그 너머에 김포가 한눈에 들어온다. 달걀 모양으로 생긴 돈대에는 4개의 포대와 병사가 주둔하던 건물터가 있다. 용당돈대를 나서면 바닷가 제방길을 따라 화도돈대, 오두돈대가 차례로 모습을 보인다. 발걸음은 어느 틈엔가 사적 강화 광성보에 닿는다. 원래 강 화외성이었던 것을 광해군 때 다시 고쳐 쌓은 후 효종 9년 (1658)에 광성보를 처음 설치됐다.
신미양요(1871) 때 치열한 격전지 중 한 곳으로 당시 조선군을 이끌었던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각과 손돌목돈대, 용두돈대가 있다. 사적 강화 덕진진을 거쳐 호국돈대길의 마지막 지점인 사적 강화 초지진에 이른다. 거대한 소나무가 초지진을 보호하듯 서 있다. 1656년에 심었다고 하니 강화에 불어닥친 숱한 풍상을 모두 지켜봤을 것이다. 게다가 신미양요 때 총을 맞은 흔적까지 남아 있다.
말없이 스쳐 간 돈대와 목숨을 바쳐 이 땅을 지켰던 선조의 바람이 마침내 대한민국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고려와 조선 왕조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용사들이 지켜 냈다. 왕조의 길은 결국 ‘민초의 길’이 아닐까.

EDITOR AE류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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