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역사를 짓다
절제된 꾸밈으로 성한 선비의 공부 공간
'보물 안동 도산서원 도산서당'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온 이황은 서너 차례 거처를 옮기며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집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다. 마침내 도산 아래 마땅한 터를 찾아낸 그는 스스로 집 모양을 궁리하고 도면을 그렸다. 보물 안동 도산서원 도산서당은 이황의 고민이 반영된 선비를 위한 최소한의 공부 공간이다.
군더더기를 허용하지 않는 가장 알맞은 집
도산서당은 퇴계 이황이 10년을 머물면서 큰 학문을 이루어 내고 쟁쟁한 제자들을 길러 낸 집이다. 제자 한 사람이 그 모습을 「도산서당영건기사」라는 글에 적기를 “당은 3칸이며, 마루는 암서, 방은 완락이라 하고 합해서 편액하기를 도산서당이라 하였다. (중략) 삼면에 퇴주를 세우고 동면은 익첨을 덮었는데 매우 수려 하였다. (방에는) 고서 천여 권을 좌우로 서가에 나누어 꽂았으며, 화분 하나, 책 상 하나, 벼루 하나, 지팡이 하나, 침구, 돗자리, 향로, 혼천의를 두었다. 남쪽 벽 위에는 가로로 시렁을 걸어 옷상자와 서류를 넣는 상자를 두었고 이 밖의 다른 물건은 없었다”라고 했다. 이황은 나이 50에 접어들자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공부에 전념하기로 작정하고 거처할 집을 마련하기 위해 애썼다.
보물 안동 도산서원 도산서당 전경

서너 차례 거처를 옮기다가 드디어 도산 아래 마땅한 터를 찾아냈고 스스로 집 모습을 궁리하고 도면을 그렸다. 서당은 나이 예순한 살에 완성되었으며, 집은 앞에서 언급했듯 이 방 1칸, 마루 1칸에 부엌 1칸이 딸린 3칸 집이었다. 방(완락재)에서는 책을 보고 잠을 자며, 마루(암서헌)에 나와서는 주변 경치를 바라보며 피로를 풀고 찾아오는 손님을 맞 았다. 부엌은 방을 덥히고 간단한 취사를 하고 허드레 물건을 넣는 데 사용했다.
동쪽 처마에는 익첨이라는 덧지붕을 대서 비바람이 들이치지 않게 했다. 이 3칸이 대학자 이황이 공부하던 집의 전부였으며, 아무 치장 없는 절제된 모습 이었다. 도산서당은 선비가 지내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인 동시에 군더더기를 허용하지 않는 가장 알맞은 집이 었다. 서당 곁에는 제자들이 기거하는 농운정사를 마련했는데 역시 간결하면서 용도에 알맞은 구성이 두드러졌다. 특히 농운정사는 안동 일대에 흔하던 도투마리집* 형태를 이루었는데, 이 집은 목수 일을 맡았던 예안 용수사의 승려 법연이 구상한 건물로 전한다.
도산서당 앞마당에는 정우당이라는 작은 연못을 두어 마루에서 내려다볼 수 있게 하고, 건너 마당에는 꽃나무를 심어 절우사라 했다. 눈을 들어 내다보면 낙동강 상류의 강물이 흐르고 강 건너 마을이 내려다보였다. 이곳에서 이황은 마음 내키는 대로 주변을 거닐고 시를 지어 자연을 벗한 흥취를 노래했다.
* 도투마리집: 베틀의 앞다리 쪽에 실을 감기 위해 얹는 H자 형태의 널빤지를 도투마리라고 하며, 도투마리집은 안동지방에서 H자 형태로 집 양 끝을 돌출시킨 민가를 지칭한다.
左)보물 안동 도산서원농운정사 右)도산서당 전면

선비의 자취를 전하는 단정하고 절제된 건물
이황이 죽고 난 후, 제자들은 도산서당 뒤에 따로 출입문을 내고 그 안에 강당과 사당을 지어 서원을 세웠고, 나라에서 는 도산서원이라는 편액을 내려주었다. 도산서원은 영남의 이름난 서원으로 우뚝 섰다. 서원을 찾는 사람들이 늘면서 건물도 고치고 문도 새로 냈지만 이황이 거처하던 도산서 당만큼은 손끝 하나 안 대고 그대로 남겨두었다.
어느 때인 가 새로 도산서원 원장으로 부임한 사람이 종이를 구해다가 서당을 말끔하게 도배한 일이 있었는데, 선생의 손때 묻은 글씨 흔적을 없애버린 일을 두고 사람들이 회의를 열어 그 원장의 이름을 서원 문적에서 삭제하고 웃음거리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그만큼 도산서당의 모든 자취를 소중히 여기고 아꼈다.
도산서당을 찾은 17세기의 선비 정시한은 『산중일기』에 “문을 열어 방에 들어가니 시렁을 걸어 서가를 만들었고 자리·베개·투호·청려장·혼천의·벼룻집·책상 등이 옛날 그대로이다. 오래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치 선생을 곁에서 모시고 있는 듯하였다”라고 소감을 적었다. 집은 그 사람의 자취이자 기억의 산실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도산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을 피했고, 6.25전쟁 같은 전란을 무사히 넘기고 오늘까지 옛 모습을 지키고 있다. 무엇보다 선생이 공부하며 지내던 서당 건물이 그대로 있어서 감동이 새롭다. 2020년 도산서당과 농운정사 건물 이 보물로 지정되어 한결 마음이 놓인다. 선생이 쓰던 책상 이나 벼루, 지팡이는 근처 유물전시관으로 옮겨 두었지만, 3칸의 단정하고도 절제된 건물이 그대로 남아 선생의 자취를 전하고 있어서 다행스럽다.

EDITOR AE류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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