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길 위에서 보물 찾기
사림(士林)의 숨결이 깃들다
'서원의 길'

조선시대 공교육을 담당하던 향교가 있었음에도 사교육 기관인 서원이 여기저기 생겨났다. 전란과 사회를 겪으면서 부패하고, 무능한 중앙정부의 공교육대신 사림이 서원을 중심으로 인재를 양성하고 향촌사회를 이끌기 시작한 것이다. 사림의 숨결이 깃든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서원 9곳 중 4곳을 소개한다.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형식을 따른 함양 남계서원

사림이 주도해 세운 최초의 서원, 사적 함양 남계서원
인생사 새옹지마라 했다. 일두 정여창 선생의 일생도 그 궤를 따랐다. 1450년 경상남도 함양에서 태어난 선생은 사림의 거두이자 영남학파의 영수인 김종직의 문인이었지만,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를 피하지 못했다.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돼 1504년 사망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니었다. 갑자사화(1504)로 부관참시라는 끔찍한 형벌을 받은 것이다. 선생의 새옹지마는 사후에도 유효했다. 중종 때 억울함이 풀린 것은 물론이고, 동방오현에 이름을 올렸으며, 마침내 광해군 2년 (1610),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성균관 문묘에 배향됐다. 선비이자 학자로서 이보다 더한 경사가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선생의 학덕을 기리는 서원도 함양에 세워졌다. 그 서원이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사적 함양 남계서원이다. ‘남계’라는 이름은 서원 앞 남계천에서 따온 것으로 명종 21년(1566) 조정으로부터 사액을 받았다.
남계서원은 전학후묘 배치 원리가 시작된 곳이다. ‘전학후묘(前學後廟)’는 서원 전면부에 강학 공간을, 후면부에 제향 공간을 배치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사당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남계천과 기름진 들녘, 야트막한 동산이 한눈에 담긴다.
반대로 서원의 정문 격인 풍영루 앞에 서면 기둥 사이로 서재와 동재, 명성당 이 차례로 보이고, 시선을 들어 풍영루 용마루 위를 올려 다보면 내삼문 너머 사당의 용마루가 권위와 질서를 상징 하듯 위엄 있게 내려앉아 있다. 서원 안에 연못이 두 개나 있어 특이한데, 이는 선생이 꽃을 좋아해서 이례적으로 조성한 것이라 전한다. 여름이면 화사한 연꽃이 서원에 생동감을 더한다.
左)함양 남계서원 명성당에 걸린 현판 右)개평한옥마을 일두고택은 일두 정여창 선생의 옛집이다.

남계서원이 자리한 함양은 예부터 수많은 유학자를 배출한 영남을 대표하는 선비의 고장이다. 그러니 일두 정여창 선생이 함양에서 태어난 것은 우연이라 할 수 없을 듯하다. 특히 선생의 고택이 있는 개평마을은 하동 정씨와 풍천 노씨 가문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유서 깊은 마을이다.
국가민속문화재 함양 일두고택은 1570년대 후손들이 지었다. 솟을대문을 지나면 행랑채, 사랑채, 안채, 사당 등이 잇대어 있다. 전형적인 양반가의 격식을 갖춘 모습에 고풍스러운 멋이 묻어난다. 손때 묻고 마모된 고가옥에서 선비의 기품이 느껴지는 이유이다.
함양은 선비의 고장답게 ‘좌함양 우안동’으로 불렸다. 특히 함양에는 정자와 누각이 100여 채 있을 정도로 ‘누정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선비들은 자연을 벗삼아 인생과 학문을 논했고 음풍농월하며 유유자적 세월을 보냈다. 지금도 ‘팔담팔정’이라 일컫는 화림동 계곡을 따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함양거연정,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함양군자정· 함양동호정, 농월정 등이 남아 있다.
주군을 향한 충정이 깃든 장성 필암서원
경상남도에 남계서원이 있다면 전라남도에는 사적 장성 필암서원이 있다. 1590년에 건립된 이 서원의 주향 인물은 하서 김인후 선생이다. 선생은 1540년 대과에 급제한 이후 조선 제12대 임금인 인종의 세자 시절 스승으로서 군신의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했던가. 인종이 즉위 8개월 만에 승하한 것이다. 주군의 죽음은 선생에게 큰 슬픔이 아닐 수 없었다. 선생은 충절의 뜻으로 낙향해 서재 를 짓고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썼다. 이를 계기로 선생은 율곡학파의 학설을 정립하는 등 호남 성리학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장성 필암서원의 홍살문과 확연루

필암서원은 선생 사후 30년 뒤인 효종 10년(1659)에 사액을 받았다. 필암은 선생의 고향인 황룡면 맥호리 맥동마을 입구에 있는 붓 바위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필암서원 일원에는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홍살문 앞에는 맑디맑은 문필천이 흐른다. 서원의 배후는 운화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지만, 서원이 자리한 곳은 경사 지형이 아닌 평지이다.
홍살문 뒤로 큼지막한 은행나무가 봄을 마중하듯 가지를 활짝 펼쳤다. 하지만 아직 봄 기색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행나무는 머지않아 연둣빛 잎사귀를 터트리며 봄을 노래할 것이다. 이같이 선비들은 자연의 시간에 순응하며 만물과 일체가 되는 천인합일의 경지를 은행 나무를 보며 깨닫지 않았을까. 서원 앞에 서면 확연루를 마주한다. 아래는 외삼문을 겸한 출입문이고, 위층은 교류와 유식 공간이다. 현판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이다.
필암서원은 기본적으로 전학후묘의 배치형식을 따랐다. 그런데 강당인 청절당의 입구가 문루를 향하지 않고 사당을 향하고 있다. 주향인 하서 김인후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추모하는 것은 물론이고 항상 바라보며 학업에 증진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청절당의 좌우에는 원생들이 기거하는 숭의재와 진덕재가 있다.
필암서원에는 특별한 건물이 한 채 더 있다. 선생과 인종의 각별한 인연을 보여주는 ‘묵죽도’를 보관한 경장각이다. 소중한 것을 공경스럽게 소장하는 건물이라는 뜻을 지닌 이 건물은 정조의 명에 따라 지었고, 현판은 정조의 친필이다. 서원과 가까운 곳에 보물 필암서원 문적 일괄 등을 전시한 유물전시관이 있다.
사적 정읍 무성서원과 사적 논산 돈암서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9개 서원 가운데 사적 정읍 무성서원은 비교적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8개의 한국의 대표 서원들과 함께 세계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을까? 무성서원은 다른 서원과 달리 주향 인물이 고운 최치원 선생이다. 그는 통일신라 인물로서 한국 유학사의 상징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그 외에 지방관으로 부임해 치적을 쌓은 인물과 흥학 활동을 펼쳤던 지역 사림들을 함께 제향한다.
서원이 마을의 중심부에 자리한 것도 특징이다. 대부분 서원이 마을과 떨어진 외곽에 있는 것과 달리 이례적이다. 이는 서원의 성격이 흥학과 교화에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차별화된 서원의 이 같은 성격은 서원의 이름과 출입문인 현가루의 이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먼저 ‘무성’은 고운 최치원 선생이 태수로 부임한 태산군(정읍의 옛 지명)의 옛 지명인 동시에 《논어》에 수록된 ‘공자가 무성에 가서 음악을 들었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백성을 잘 다스리려면 서원이 백성과 가깝게 있어야 한다’는 뜻에 따른 것이다. 문루의 이름도 고사 ‘현가지 성’에서 따왔다. 무성서원이 사액을 받은 것은 숙종 22년 (1696)이다.
01. 논산 돈암서원의 현판은 둔암서원이라 적혀 있다. 02.논산돈암서원의 강당인 응도당 내부에서 본 모습 03.정읍 무성서원 강당인 명륜당

현가루를 지나 마당에 들면 정면에 학습 공간인 강당, 그 뒤로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우 태산사가 이어진다. 강당은 중앙에 마루가 놓여 있어 시원한 개방감을 선사한다. 그 덕분에 강당 뒤편에 있는 태산사 내삼문에 그려진 태극문양이 또렷하게 보인다. 강당 오른쪽 강수재로 연결된 좁은 문을 나서면 비각과 병오창의 기적비를 마주한다. 병오창 의는 1906년 면암 최익현과 둔헌 임병찬이 을사늑약에 항거한 것으로 호남 최초의 항일 의병 운동이다. 이처럼 무성서원은 학문을 위한 학문이 아닌, 현실 정치와 사회 교화에 적극적으로 앞장선 서원으로서 무성의 진정한 의미를 잘 살린 서원이다.
우리나라 성리학은 지역에 따라 퇴계 이황을 잇는 영남학 파와 율곡 이이를 따르는 기호학파로 나뉜다. 기호 지역은 호서 즉, 충청도와 경기도를 일컫는다. 논산은 기호학파의 중심으로 10여 개의 서원이 있다. 그 가운데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서원은 정읍 무성서원에서 차량으로 1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 충남 논산의 사적 논산 돈암 서원이다. 1634년 건립 이후 1660년에 사액을 받은 돈암서원은 김장생과 송시열을 주향하는 서원이다. 원래 자리는 연산면 숲 말산 기슭이었다.
서원의 이름도 그곳에 있던 돈암(豚岩, 돼지바위)에서 따왔다. 하지만 서원 이름에 돼지 돈(豚)자를 쓸 수 없었기에 물러날 둔(遯)자를 써서 현판엔 둔암서원이라 적혀 있다. 1880년 홍수가나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서원에 들면 보물 논산 돈암서원 응도당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우리나라 서원 가운데 유난히 규모가 크기 때문이다. 내부 공간도 큰 규모에 걸맞은 품격이 느껴진다. 이는 당시 돈암서원의 기세를 엿볼 수 있는 규모이다.

EDITOR AE류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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