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그 사람이 추천하다
500년 왕조의 혼을 담은 후세를 위한 매뉴얼 보물 조선왕조 의궤
'역사학자 신병주'

여러 방송 활동과 저서를 통해 어렵고 딱딱한 역사 지식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내는 신병주 교수, 대중과 꾸준히 역사로 소통하는 이유를 묻자. "역사란 우리 안에 되살아날 때 비로소 그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가 추천한 문화재 역시 역사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닿아 있었다. 대중에게 가장 친숙한 역사학자 신병주 교수가 추천한 문화재, 보물 조선왕조 의궤를 만나본다.


조선왕조 기록문화의 꽃
‘의식(儀式)의 궤범(軌範)’이란 뜻의 의궤(儀軌)는 오늘날 국가적인 의례나 행사를 치른 후 관련 기록을 정리한 보고서 혹은 백서와 같다. 국가 의례나 행사에는 상시적으로 행해지는 제사와 의례, 건물 수리부터 국왕과 왕세자 등의 혼인이나 책봉, 장례, 사신 접대, 궁궐의 대대적인 중건 같은 특별한 일까지 모두 포함된다. 이 경우 국가에서는 후대에서 참고할 수 있도록 참여한 인원과 들어간 비용을 모두 정리해 의궤로 남겼다.
의궤에는 화려하고 다양한 도설과 인적·물적 자원의 동원 사례, 노임 지급사례 등 기존 편년 사서에서 확인할 수 없는 구체적인 기록이 담겨 있다. 이러한 평가를 바탕으로 조선왕조의궤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기록문화유산으로 인정받아 2007년 6월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한 예로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를 보면 66세 영조와 15세 신부 정순왕후의 혼례식 전 과정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리고 50면에 걸쳐 실린 〈친영반차도(親迎班次圖)〉 에 그날의 현장이 생생히 담겨 있지요. 왕과 왕비의 행차, 호위하는 선상(先廂), 전사대(前射隊), 후상(後廂), 후사대(後射隊)는 물론이고 말을 탄 궁녀처럼 궁궐 하위 직급 여성들의 모습도 세밀하게 표현돼 있어요. 379필의 말과 1,299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각종 신분의 인물이 임무와 역할에 따라 위치를 정해 행진하는 모습이 이채롭습니다.”
의궤에는 화려하고 다양한 도설과 인적·물적 자원의 동원 사례, 노임 지급사례 등 기존 편년 사서에서 확인할 수 없는 구체적인 기록이 담겨 있다. 이러한 평가를 바탕으로 조선왕조의궤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기록문화유산으로 인정받아 2007년 6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정조 18년(1794) 1월부터 20년(1796) 8월까지
수원화성을 축성하며 그 건설 과정 및 기타 제반 사항을 모두 기록했다. ⓒ국립중앙박물관

1세기 동안 잠들어 있던 외규장각 의궤, 우리 품으로 돌아오다
의궤는 후대 왕실의 귀중한 매뉴얼이 되었지만, 우리가 그 모습을 온전히 확인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잠들어 있던 외규장각 의궤가 2011년에야 우리 품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의궤는 국왕의 열람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어람용(御覽用)과 중앙의 관련 관청에서 비슷한 행사가 있을 때 참고하거나 항구적으로 보관 하기 위해 만든 분상용(分上用)으로 나뉜다.
어람용 의궤는 본래 궁궐에 보관되었지만 1782년 정조는 전란과 화재로부터 보존하기 위해 강화도 행궁 안에 규장각(奎章閣)의 분소로 외규장각(外奎章閣)을 설치해 어람용 의궤를 보관했다. 그러나 1866년 병인양요가 발발하자 의궤를 비롯 한 340여 점의 도서가 약탈되었고, 약탈된 외규장각 의궤는 1세기가 다 되어 가는 동안 프랑스 국립도서관 창고에 방치 되었다.
上) 6·25전쟁 당시 파괴된 수원화성은 1976년 화성성역의1976년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해 복원됐다.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건축물은 원본 그대로인 건축물을 인정하지만 그림과 글로 설계도와 내용을 철저하게 남겨놓은 화성성역의궤 덕분에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었다는 점을 인정받아 이례적으로 유네스코 세적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다.
下)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英祖貞純王后嘉禮都監儀軌)의 반차도. 379필의 말과 1,299명의 인물이 등장하지만, 왕의 어진은 그리지 않고 비워두고 절대 존엄인 위상을 강조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이는 1979년 파리 국립도서관에 근무하고 있던 박병선 박사(작고)가 그 행적을 밝혀내면서 비로소 알려졌다. 2002년 의궤 반환을 위해 꾸린 실사단으로 참여한 신병주 교수는 어람용 의궤를 처음 마주한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의궤를 반환받기 위해 2002년부터 2006년까지 프랑스를 5번 방문했어요.
그때 어람용「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 의궤」를 처음 보았는데 서울대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던 분상용과 차이가 많아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대부분 표지가 개장돼 있었지만, 원형이 잘 보존된 어람용 의궤의 경우 표지를 녹색 비단으로 장식하고 그 위에 흰색 비단을 따로 붙여 제목을 썼어요. 종이도 분상용에서 사용하는 저주지가 아닌 고급스러운 초주지를 사용했고, 서체와 필사, 그림 수준도 훨씬 뛰어났습니다.”
민관과 학계의 노력으로 분상용 의궤에는 없는 유일본 30책을 포함한 어람용 의궤 296책이 프랑스에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입장을 고려해 완전한 반환이 아닌 5년마다 대여 기간을 갱신해야 하는 조건이 뒤따랐다. 그 때문에 외규장각 의궤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물론 국가지정문화재 지정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의궤가 돌아오는 과정에 참여하게 돼 보람이 컸지만, 여전히 미완의 과제가 남아있습니다. 차후에 완전한 반환이 이뤄질 수 있도록 대책이 마련되어야 해요.”
左)30년간 역사를 연구했음에도 모르는 것을 배우고 신병주 교수의 아는 것을 나누려는 열정은 처음 그대로이다.
右)정조가 사도세자의 원소가 있는 수원으로 행차하는 장면을 그린 화성원행의궤도에는 궁중 연회에 사용된 기물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신병주 교수에게 역사는 후세를 위한 지침서였던 의궤처럼, 현재와 미래를 위한 길잡이이다. 다양한 역사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저서와 강연 활동을 통해 대중과 꾸준히 소통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30년간 역사를 연구했음에도 모르는 것은 배우고 아는 것은 나누려는 그의 열정은 처음 그대로이다.
“역사는 박제화된 박물관 속이 아닌 현재를 사는 우리 안에 되살아날 때 가치를 지닐 수 있습니다. 자기가 사는 주변 곳곳의 다양한 유적지를 통해 과거를 상상해 보고, 역사와 소통해보길 바랍니다. 앞으로도 대중에게 재밌는 역사 이야기를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DITOR AE류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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