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오늘과 내일
천년의 종이가 빚어내는 빛의 아름다움
'한지, 공간의 분위기를 바꾸다'

주변을 강렬하게 비추던 빛이 한지 안에 스며드니 편안함과 따스함을 자아낸다. 낮에는 빛을 안으로 끌어들이고 밤에는 이를 퍼지게 하는 한지 조명은 주변을 은은하게 밝히며 어떤 공간이든 감각적으로 바꾸어 준다. 한지의 매력을 빛에 고스란히 담아낸 디자이너 권중모 작가는 수묵화처럼 은은하게 퍼지는 조명을 만든다. 여름날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처럼, 질리지 않는 빛을 빚어내는 권중모 작가를 만났다.


전통의 현명함과 이로움을 좇다
햇살 가득 머금은 한지 창에는 봄날의 아지랑이 같은 닥 종이의 고운 결이 춤을 춘다. 가끔은 봄바람에 살랑거리는 나뭇가지 실루엣이 한 폭의 수묵담채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자연을 담고 자연과 어울릴 줄 아는 한지 속에는 우리 선조들의 지혜도 담겨 있다. 한지를 창호지로 쓰면 문을 닫아도 공기가 통하며, 눅눅한 장마철에는 제습제 하나 없어도 방 안이 보송보송하다. 한지를 살아 있는 종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권중모 작가는 이처럼 다른 소재와 달리 날것 같은 생생함을 주는 한지의 특성에 주목했다.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그는 스페인 바르셀로나 IED에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했다. IED는 이탈리아 국제 디자인 학교로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등 9개 도시에 설립돼 있다. 유학 시절,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전통 재료를 사용하는 타국의 문화를 접한 뒤 우리나라 고유 소재를 활용하는 방법을 고민했다.
“북유럽은 가구 대부분을 자작나무로 만들고, 주거에도 자작나무가 빠질 수 없어요. 그 자체가 환경이기에 전통과 현대라는 구분 없이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것이죠. 이와 달리 우리나라는 전통 소재가 멀게 느껴지곤 합니다. 그 차이를 넘어 우리 주변에서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살아있는 종이’가 만든 은은한 빛
칠보와 법랑 기법을 활용해 공예품을 제작하기도 했던 그는 2013년 우연한 기회로 한국공예디자인진흥원이 주최한 ‘한지 워크숍’에 참여했다. 그때만 해도 종이에 지나지 않는 한지로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할거라 생각 했다. 그러나 한지를 공부하면 할수록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엿보였다.
“한지는 조선시대 때 ‘지갑(紙甲)’으로 불리는 갑옷 소재 로도 사용될 만큼 강한 내구성이 있어요. 비싸고 구하기 힘든 철이나 가죽 대신 질긴 한지를 겹겹이 붙인 뒤 옻칠을 했는데 조총이 뚫기 힘들 만큼 강했죠. 그에 비해 무게는 훨씬 가벼워 오늘날의 기능성 소재처럼 애용됐다고 해요. 또 최대 보존 기간이 200년가량인 양지와 달리 한지는 천 년 이상 보존할 수 있습니다. 국보 불국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같은 우리 문화재에서도 그 우수성을 살펴볼 수 있죠.”
01. LF04Jp (Layers Floor04 Joycepiece), 300 x 200 x h :1500mm, 한지, Brass, 아크릴, Led, Floor, 2020 ?권중모
02. abstract fiber series, 700 x 30 x h :1400mm, 700 x 30 x h :1400mm, open, wall piece, 2019 ?권중모
03. Layers Circles_OM(Layers Circles Onyang Museum), 6500 x 50 x h :2100mm, 한지, Brass, Led, 아크릴, installation, 2020 ?권중모

다양한 인테리어 요소 가운데 권중모 작가가 조명을 만들게 된 이유는 그것이 주는 특별함 때문이다. 그 자체만으로 존재감을 뽐내는 가구나 가전제품과 달리 조명은 단순히 주변을 밝히는 것을 넘어 디자인에 따라 빛이 아름답게 번질 수도, 은은하게 새어 나오기도 하며 공간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빛은 어떤 소재를 투과하고 어떤 공간에 확산되는지에 따라 그 느낌과 감촉이 다르게 보입니다. 이런 빛의 특성을 이용해 손이 아닌 눈으로 빛을 만지는 것과 같은 느낌을 전달하고 싶었어요. 한지는 이를 나타낼 수 있는 적합한 소재였습니다.”
그는 한지의 불규칙적인 특성을 조명에 적용했다. 닥나무 껍질을 물에 불려 만드는 한지는 섬유질이 그대로 살아 있어 종이의 질감이 드러나는데 그 때문에 빛을 비추면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이 만들어 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빛을 머금고 확산하는 표현력도 섬세해 밝은 LED 빛도 자극적이지 않게 나타낼 수 있다. “한지의 매력은 한옥의 창호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어요. 창호지는 불투명하지만, 빛은 투과시켜 낮에는 밖에서 들어오는 자연광으로 실내가 환해지고, 밤에는 방에 켜 둔 촛불 빛이 자연스럽게 새어나갑니다. 은은하고 자연스럽게 빛을 담아내거나 확산하는 것이죠.”
左) Layers_Pendant, 1200 x 170 x h :350mm, 한지, Brass, 아크릴, Led, Pendant, 2017?권중모
右) 천년의 종이를 일상 속 조명으로 재탄생시킨 권중모 작가는 생활 속에서 전통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길 바란다.

한지, 공간의 분위기를 바꾸다
내구성이 있는 소재이지만, 한지로 조명을 만들기까지 많은 시행착오가 잇달았다. 사용하는 한지 두께와 수에 따라 빛의 느낌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최적의 빛을 찾기 위해 그는 인사동과 지방 곳곳에 자리한 공방으로 발품을 팔며 적합한 한지를 찾아다녔고, 손으로 한지를 무작정 접거나 여러 겹 겹쳐 가며 작품을 구상했다. 그의 대표작인 〈레이어스 플로어〉 시리즈는 한복의 주름을 재해석한 패턴을 담았다. 주름은 그의 작품 대부분에 등장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차가운 황동과 어우러진 한지 조명은 모던하면서도 지극히 한국적인 느낌을 준다.
“유학 시절, 산업디자이너라도 직접 손으로 자신의 디자인을 구현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어요. 그 덕분에 손으로 작업하는 것이 익숙합니다. 그 대신 형태를 미리 구상하지 않고 직감을 따라 여러가지 방법으로 접어봅니다. 그러다 보면 괜찮은 패턴이 나오는데 그 형태를 정리한 뒤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요. 〈레이어스 플로어〉 시리즈 같은 경우, 외형 틀은 황동으로 작업해야 하기 때문에 외부 업체와 협력하지만 마감만큼은 꼭 제 손으로 해요.”
권중모 작가는 현재 부피를 지닌 입체적인 형태의 한지 조명을 구상하고 있다. 천년의 종이를 일상 속 조명으로 재탄생시킨 그는 자신의 작품처럼 생활 속에서 전통이 어우러지길 바란다.
“주변에서 자주 보고 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리 전통 요소의 장점을 활용한 다양한 작품이 많이 나오고 꾸준히 사랑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한지의 매력을 나타낼 수 있는 작업을 계속 이어가려고 해요.”

EDITOR AE류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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