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길 위에서 보물 찾기
고도에 남아 있는 역사의 흔적을 따라 걷다
'백제 고도의 길'

면도날 같은 바람이 대기에 가득한 새벽, 여명을 뚫고 부여 궁남지 앞에 섰다. 궁남지에는 지난밤 소담스럽게 눈이 내렸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에 길을 낸다. 연못 주변에 늙은 버드나무들이 쑥대머미를 한 채 밝아올 아침을 기다리고 있다. 정자에 올라 찬란한 태양을 마주하며 백제의 역사를 떠올려 본다.
백제 고도의 길, 천년의 시간을 거꾸로 돌리다
고대왕국 백제는 기원전 18년 온조왕이 한강 유역에 세운 나라이다. 백제는 ‘백성이 즐겁게 따랐다’라는 뜻이다. 곱씹을수록 멋진 이름이다. 백제는 고구려와 신라보다 먼저 나라의 기틀을 세웠으며 근초고왕에 이르러서는 전라도 전역과 고구려의 평양성 근처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그 영화는 100년을 가지 못했다. 고구려 장수왕이 475년에 백제의 위례성을 함락한 것이다. 이후 백제는 도읍을 웅진, 지금의 공주로 옮겨 공산성을 쌓았다. 국난을 극복하고 다시 옛 영화를 되찾기 위한 부흥의 토대를 공주에서 마련 했다. 국운이 다시 팽창할 때쯤 성왕은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겼다. 더 크고 넓은 땅이 필요했으리라.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인 사적 부여 궁남지 일출

성왕의 뒤를 이은 무왕은 궁남지와 각별한 인연이 있다. 무왕 탄생 설화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궁남지 옆에 살았 다고 한다. 어느 날 무왕의 어머니가 궁남지에서 나온 용을 보고 놀라서 의식을 잃었는데 깨어나 보니 아이를 잉태 했다. 그 아이가 신라의 선화공주와 결혼한 서동으로 더 많이 알려진 무왕이다. 궁남지는 634년에 무왕이 조성한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이다. 경주의 동궁 월지보다 약 40년 정도 앞선 것이다. 현대에 와서 궁남지는 연꽃 여행지로 인기가 높다. 매년 7월 중순에 백련, 홍련등 다양한 연꽃이 25,000여 평의 드넓은 연밭에 만발한다.
공주에서 시작한 백제 고도의 길은 부여를 거쳐 익산으로 이어진다. 그중 부여는 부소산성을 중심으로 역사유적이 모여 있어 왕도의 숨결을 느낄 수 있지만, 익산은 속절 없는 세월이 야속할 만큼 눈에 보이는 것은 황량한 터만 보일 뿐이다. 그러나 무엇이든 눈에 보이는게 전부가 아니듯, 땅 아래 묻힌 이야기는 천년의 시간을 거꾸로 돌릴 만큼 무궁무진하다.
부여, 부흥의 깃발을 꽂다
백제는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로 옮긴 후 538년경에 나성(사적)을 쌓았다. 왕궁(사비도성)의 서쪽은 금강이 가로막고 있어 안전한데 비해 상대적으로 동쪽 지역은 방어시설이 부족했다. 이에 외곽 성으로 나성을 쌓았다. 나성의 총 길이는 8.4km지만 천년이 넘는 긴 세월을 거치면서 지금은 약간의 흔적만 찾아볼 수 있다. 성안에는 왕궁과 절, 관아, 민가 등으로 추정되는 터가 남아 있어 옛 규모를 어림잡을 수 있다.
나성 인근 사적 부여 왕릉원은 6세기 중엽 이후 것으로 추정된다. 기존 백제 고분과 달리 외래문화를 백제문화로 소화한 시기에 지어진 고분으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관람 동선은 부여 왕릉원을 먼저 돌아 보고 전시관을 거쳐 나성을 돌아보면 된다.
성왕은 천도 이후 나성과 함께 정림사를 지었다. 발굴 당시 기왓조각에서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라는 글 이 발견돼 정림사로 불린다. 현재 절터에는 국보 부여 정림 사지 오층석탑을 중심으로 중문·연못·강당 등이 남아 있다. 석탑 앞에 서면 목재를 다루듯 유연하게 석재를 다듬 었던 백제 석공들의 기술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단아하고 정교한 아름다움은 백제 예술의 극치를 보는 듯하다. 석탑 뒤편에 있는 보물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은 고려 때 만든 것이다. 세월의 풍파를 온몸으로 맞아 형상 이 또렷하지 않은데 그것이 오히려 오묘한 아름다움을 더 한다.
사적 부여 정림사지에는 중문, 연못, 오층석탑, 강당이 일직선으로 놓여 있다.

사적 부여 정림사지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사적 부여 관북리 유적과 사적 부여 부소산성이 있다. 관북리 유적은 왕궁지로 알려진 곳이다. 부소산(106m) 기슭에 민가와 함께 자리해 아늑한 느낌을 준다. 옛 왕궁시설로 보이는 터와 배수시설 등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부소산은 나지막한 산이지만 사비도성의 배후산성 겸 후원으로 추정된다. 예부터 지역민들은 부소산을 ‘솔뫼’라고 불렀는데, 소나무가 많아서이다. 평시에는 왕가가 깊은 송림을 거닐며 유유자적했으리라. 산책로는 유모차를 끌고 다닐 수 있을 만큼 길이 좋고, 걷기에 수월하다. 산책로를 따라 동헌과 객사, 삼충사, 영일루, 반월루가 잇댄다. 또 산책로는 여러 갈래로 나뉜다. 그 가운데 축성 당시의 성곽을 따라 걷고 싶다면 테뫼식 산성길을 걸어보자. 토성으로 지어진 옛길에서 흙을 밟는 기분이 색다르고 솔향이 그윽 하다.
어느 코스를 선택하든 중간 반환점은 부소산 정상부에 자리한 낙화암이다.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을 굽어보기 좋은 곳이다. 낙화암 비탈진 곳에 삼천궁녀의 넋을 달래는 백화정이 있다. 백마강의 수려한 경치를 제대로 보고 싶다면 낙화암을 돌아 전망대에 올라보자. 위태롭게 자리한 고란정과 백제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장구한 세월을 흘러온 백마강이 유장하다.
左)나성과 함께 돌아보기 좋은 사적 부여 왕릉원 中)국보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백제인들의 돌 다루는 솜씨를 엿볼 수 있다.
右)20여 년이 지난 뒤 깔끔한 모습으로 거듭난 국보 익산 미륵사지 석탑

익산, 땅이 기억하는 백제의 역사
부여에서 차량으로 40분 거리에 있는 전북 익산. 이곳에 사적 익산 왕궁리 유적과 사적 익산 미륵사지가 있다. 경주와 공주, 부여와 더불어 우리나라 4대 고도 중 한 곳이다.
사적 익산 왕궁리 유적은 미륵사지와 함께 가장 규모가 큰 백제의 유적이다. 무왕은 어지러운 정세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 묘책이 익산 천도였다. 왕권을 강화하고 새로운 세력을 규합하기에 가장 좋은 빅 이벤트였다. 하지만 그의 꿈은 백제 패망과 함께 그가 왕도로 건설했던 익산 땅에 묻히고 말았다. 심지어 백제가 멸망한 이후 왕궁터에 사찰이 들어서는 등 백제의 흔적이 대부분 지워졌다. 그런데도 왕궁리 유적은 백제 왕궁으로서는 처음으로 왕궁의 외곽 담장과 내부 구조가 확인된 유일한 유적으로 역사적 가치가 크다.
왕궁터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국보 익산 왕궁리 5층 석탑이다. 이 탑은 고려 때 것으로 추정하나 아직 의견이 분분하다. 그런들 어떠랴. 황량한 터에 군계일학처럼 홀로 서 있지만, 그 위엄만큼은 천년의 세월을 감당하기에도 부족하지 않은 것을.
01.왕궁리 유적 전경 02.국립익산박물관에 재현된 미륵사 모습 03.부여읍내와 구드래 들판, 백마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반월루

백제 고도의 길 마지막 유적지는 동아시아 최대의 사찰터로 손꼽히는 사적 익산 미륵사지이다. 봉긋하게 솟은 미륵 산을 병풍 삼아 너른 땅에 미륵사가 있었다. 절을 창건한 이는 무왕이다. 《삼국유사》에 창건 설화가 전해 온다. 무왕이 선화공주와 함께 미륵산 사자사의 지명 법사를 찾아가던 중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에 왕비가 무왕에게 간청하여 이 연못을 메우고 세 곳에 탑과 금당, 회랑을 세웠다고 전한다. 설화를 방증하듯 미륵사에는 탑과 금당이 셋이었다.
일반적으로 백제의 사찰은 1탑 1금당 형태를 취하는데 이례적인 일이다. 무왕은 왜 백제의 가람 배치 형식을 파괴하면서까지 이처럼 거대한 사찰을 지었을까. 이유는 당시 백제가 신라와 잦은 전쟁으로 민심이 흉흉했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에 무왕은 당시 유행했던 미륵 사상을 토대로 백성에게 정신적 안정과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 미륵사를 지었을 것이다. 미륵사는 천년의 시간을 지나면서 그 자취를 감췄다. 지금 남은 것은 서탑과 동탑 그리고 당간지주뿐이다. 이들 세 구조물이 미륵사의 엄청난 규모를 웅변하듯 서 있다.
서탑은 국보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고, 동탑은 현대에 와서 복원한 탑이며, 보물 익산 미륵사지 당간지주는 통일신라 것이다. 문화유산에서 가장 가혹한 것은 시간의 무게이다. 동탑은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사라졌고, 서탑 역시 허물어져 갔다. 더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일제강점기에 시멘트를 발라 보수했지만, 오히려 흉물스러운 몰골이 되고 말았다. 마치 나라를 잃은 민초들의 일그러진 얼굴처럼. 그렇게 수 십 년을 견뎌오다 마침내 2001년 전면 해체작업에 착수했고, 20여 년이 지난 뒤 깔끔한 모습으로 거듭났다.
복원 과정과 당시 발굴된 보물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 등은 미륵사지 입구에 있는 국립익산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복원된 미륵사지 석탑은 아직 낯선 모습이다. 천 년 전의 돌과 현대의 돌을 맞붙여 놓아 생경한 까닭이다. 그러나 확신한다. 시간의 때가 묻으면 어느 틈엔가 하나가 되어 잘 어울릴 것을. 이것이 백제 고도의 길이 전하는 메시지가 아닐까?

EDITOR AE류정미
문화재청
전화 : 1600-0064 (고객지원센터)
주소 : 대전광역시 서구 청사로 189 정부대전청사 1동 8-11층, 2동 14층
홈페이지 : http://www.cha.go.kr
다양하고 유익한 문화재 관련정보
본 칼럼니스트의 최근 글 더보기
해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