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타박타박 걷는 문화유산 오솔길
번영과 굴욕이 교차하는 왕가의 길을 걷다
'‘왕가의 길’을 압축한 ‘국왕의 길’'

왕은 왕조시대의 중심이다. 따라서 왕이 머물던 궁궐 또한 존엄한 공간이었다. 조선시대 한양에는 정궁인 경복궁을 비롯해 다섯 개의 궁궐이 있었으며, 전란이나 유사시를 대비한 행궁이 강화도와 남한산성에 있었다. '왕가의 길'을 따라 조선시대 궁궐 건축의 백미로 손꼽히는 창덕궁과 난공불락의 요새, 남한산성으로 향한다.
자연과 인공, 동서 문화가 조화 이룬 창덕궁
창덕궁은 지형지물에 맞게 지은 독특한 특징이 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조화를 이뤄 조선시대 5대 궁궐 가운데 정수로 꼽힌다. 1997년 12월 3일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열린 제21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수원 화성과 함께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창덕궁은 왕의 공적 공간인 외전과 왕과 왕가의 사적 공간인 내전, 궁궐의 정원인 후원으로 나뉜다. 보물 돈화문은 창덕궁의 정문이다. 현존하는 궁궐의 대문 가운데 가장 오래 됐으며 유일하게 정면이 5칸이다. 돈화문을 지나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회화나무를 마주한다. 300~400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조선의 번영과 위기의 순간을 함께한 셈이다. 활짝 열린 보물 인정문 사이로 인정전이 위엄을 뽐낸다. 인정전은 왕의 즉위식이나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 등 공식 국가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겉은 2층이지만, 실내는 하나로 트여 단층이다. 실내에는 서양식 가구와 마루, 커튼, 샹들리에가 설치돼 있다. 조선 제27대 왕 순종대에 이르러 근대화의 급물살이 밀려온 결과이다.
보물 선정전은 임금의 집무실인 편전이다. 인정전과 같은 선상이 아닌 옆으로 비켜있다. 지형 여건상 인정전 뒤에 건물을 짓기에 부적절해 위치를 변경한 것이다. 선정전 동쪽에 내전인 희정당이 있고, 그 너머에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이 있다. 대조전 대청은 서양식 거실로 꾸며져 있다. 게다가 침실에는 침대까지 있다. 동서양의 조화가 생경하다. 왕가에서 만나는 이 같은 낯섦은 안타까움으로 이어진다. 굴곡진 역사를 아는 까닭이다. 그 흔적은 보물 낙선재에도 남아 있다. 낙선재는 원래 창경궁에 속했으나 고종 13년(1876)에 경복궁에 큰불이 난 뒤 편전으로 이용했다. 왕가의 권위나 위엄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이곳에서 고종은 열강의 사신들과 마주했다.
창덕궁의 숨은 보석 후원은 자연과 조화를 이룬 왕가의 휴식처이다. 후원은 자연 지형에 인공미를 더하였으나 훼손하지 않고 조화를 추구했다. 부용지를 중심으로 주변에 왕과 왕실 가족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독서를 했던 부용정, 왕실의 도서를 보관하는 규장각 주합루, 과거시험을 보던 영화 당이 있다. 북쪽으로 발길을 돌리면 연꽃을 특히 좋아했던 숙종 때 지은 애련지에 닿는다. 그 너머에는 사대부 가옥을 본떠 지은 보물 연경당이 있다. 120칸의 저택이지만 궁궐에 비하면 소박하다. 완만한 비탈을 내려서면 다양한 정자가 한곳에 모여 있다. 임금은 옥류천 청의정에서 농사를 직접 체험하고 백성들의 삶을 몸소 느꼈다고 한다.
왕가의 기품이 느껴지는 창덕궁

난공불락의 남한산성, 한양을 방어하다
예로부터 경기도에는 수도 서울을 방어하는 4곳의 요새가 있었다. 사적 남한산성도 그중 하나로 동남쪽 요새이다. 서울 도심에서 24km 떨어진 곳이다. 성이 있는 광주시는 약 80%가 산지로서 산골짝을 적신 물은 한강으로 흘러든다. 남한산성은 삼국시대 한반도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 이었다. 백제 시조 온조대왕의 사당인 숭렬전이 이곳에 조성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를 남한산성 이라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에 맞서 싸웠던 곳도 이곳이다. 산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한 이는 조선 제16대 왕 인조이다.
남한산성 행궁의 정문인 한남루

그 당시 227칸의 행궁과 함께 옹성 3개와 대문 4개, 암문 16개를 짓고 우물 80개를 팠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큰 성문 밖에 원형이나 방형을 쌓은 작은 성이고, 암문은 성곽에 문루를 일부러 세우지 않고 뚫은 문이다. 즉, 적군이 쉽게 발견하지 못하도록 만든 비밀통로인 셈이다. 행궁은 임금이 궁 밖으로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물던 별궁으로 전란 발생 시에는 피란처로 사용됐다. 남한산성의 용도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구한말에는 외세에 항거하던 의병의 기지로 사용됐다. 이러한 이유로 일제는 성안에 무기고와 화약고가 있다며 많은 시설들을 무참히 파괴했다. 남한산성은 삼국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국난이 있을 때마다 항쟁의 거점이 었다. 하지만 남한산성은 우리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크나 큰 치욕의 현장이기도 하다.
1636년 병자년 12월 2일 청 태종이 이끈 20만 군사가 파죽 지세로 조선 곳곳을 짓밟는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열이틀 후인 14일, 인조는 한양의 도성을 버리고 남한산성에 몸을 숨겼다. 47일간의 항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청군의 포위로 산중에 고립된 인조와 군사들에게 추위와 굶주림, 무엇보다 고립이라는 감당할 수 없는 공포가 엄습했다. 이듬해 1월, 임금은 치욕의 ‘하성(下城)’을 결심하고 삼전도에서 항복했다. 삼전도의 굴욕 이후 많은 신하와 왕자가 인질로 잡혀갔고, 청 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자랑하는 ‘삼전도 비’를 세웠다.
‘왕가의 길’을 압축한 ‘국왕의 길’
남한산성은 수도권에 있어 주말이면 수많은 사람이 찾는다. 남한산성 트레킹 코스는 1코스 장수의 길, 2코스 국왕의 길, 3코스 승병의 길, 4코스 융성의 길, 5코스 산성의 길로 나뉜다. 그 가운데 2코스 국왕의 길은 조선시대 국왕의 공간이 었던 행궁에서 출발해 침괘정을 지나, 병자호란 시기 인조가 항복하러 성문을 나간 서문을 아우른다. 총거리 2.9km 이며 1시간 정도 걸린다. 사적 남한산성 행궁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훼손했던 것을 1999년 발굴 조사를 시작하여 2011년 한남루 복원을 끝으로 중건한 것이다. 행궁의 정문에 해당하는 한남루는 ‘한 강 남쪽 성진(城鎭)의 누대’라는 뜻이다. 한남루를 지나면 외삼문, 외행전, 내행전이 궁궐 건축 양식에 따라 일직선상에 자리한다. 좌전과 우실에 각각 종묘사직을 옮길 수 있도록 시설을 갖춘 것이 남한산성 행궁의 특징이다.
左)남한산성 행국(사적) 右)남한산성의 여장안으로 산책로가 놓여 있다.

행궁이 있는 산성리는 조선시대 한강 이남에서 가장 번성 했던 지역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근대로 접어들면서 남한산 성이 행정·군사도시로서의 위상을 잃자 산성 인근에 거주 하던 주민들이 음식 장사를 시작했다. 이후부터 산성사거리 주변에는 닭백숙, 산채비빔밥, 도토리묵 등을 파는 식당 이 줄을 잇게 되었다. 즐비한 식당가를 지나 숲에 발을 들이면 한결 고즈넉하다. 이후 비탈을 오르면 백제의 시조 온조 왕과 산성 축성 당시 책임자였던 이서 장군을 모신 숭렬전에 이른다. 그리고 발걸음을 재촉하면 서장대로 불리는 수 어장대에 도착한다. 장대란 지휘관이 군대를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쌓은 대(臺)를 일컫는다.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수축 당시엔 4개의 장대가 설치됐다.
그러나 현재 남은것은 이게 유일하다. 47일의 항쟁 중에 인조는 여기서 직접 군사를 지휘했다고 한다. 그 당시엔 단층이었지만 영조 27년 (1751)에 2층으로 증축했다. ‘수어장대’라고 쓴 편액이 걸린 것도 그때였다. 국왕의 길은 우익문(서문)으로 이어진다. 성문 주변은 가파른 산세와 굳건한 성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난공불락의 요새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인조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1637년 스스로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추위와 배고픔, 심장을 옥죄는 고립감과 공포심은 항전 의지마저 얼어붙게 했을 것이다.
左)서장대로 불리는 수어장대 右)연주봉 옹성

마지막 북문을 향하는 길목에 연주봉 옹성이 있다. 옹성은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하고, 요충지에 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다른 성에서는 찾아 보기 어렵다. 옹성 앞에는 포대가 있어 적이 성으로 접근하는 것을 미리 막아준다. 드디어 마지막 지점인 전승문(북문)에 이른다. 문의 이름은 정조 3년(1779) 성곽 개보수 때 명명한 것이다. 전승(全勝)이란 다시는 병자호란과 같은 치욕을 당하지 말자는 뜻이 아닐까. 왕가가 걸었던 길은 찬란한 번영의 길만 있는 게 아니다. 때론 치욕과 불명예의 길도 있다. 이것이 역사가 우리 에게 전하는 메시지일 것이다.
문화유산 방문 캠페인
문화재청은 ‘문화유산 방문 캠페인’을 통해 우리 문화유산의 가치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고 많은 사람들이 문화유산을 방문할 수 있도록 홍보한다. ‘문화유산 방문 캠페인’은 우리의 대표 문화유산을 지역과 특색에 따라 묶어낸 10가지의 길(문화유산 방문코스)로 안내한다.

EDITOR AE류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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