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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 깊은 역사와 해학이 담긴 장승문화, 세계에 널리 알리다
'타목(打木) 국가무형문화재 목조각장, 하회별신굿탈놀이 이수자 김종흥'

고목처럼 거대한 몸집과 익살스러우면서도 험상궂은 표정으로 마을을 지켜주는 장승. 김종흥 명인은 예로부터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해온 장승을 예술로 승화했다. 국가무형문화재 목조각장과 하회별신굿탈놀이 이수자인 그는 우리나라의 전통과 역사가 깃든 장승문화를 널리 알리기 위해 지금도 세계 곳곳을 누비며 장승 퍼포머스를 펼치고 있다.
마을 수호신 장승을 예술로 승화하다
머리띠를 질끈 동여매고 자귀로 장승을 조각하는 초로의 사내. 투박한 장승의 형체가 만들어지는 절정의 순간이 다가 오면 그는 상투를 풀어헤치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망치로 나무를 내리친다. 장승을 주제로 한 김종흥 명인의 흡인력 있는 퍼포먼스는 관객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그는 한국의 장승을 알리기 위해 장승을 조각하고 창의적인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옛 사람들은 장승을 신령처럼 여겨 제사를 지내거나 치성을 드리기도 했어요. 전통적인 장승은 근엄하고 무서운 표정으로 좌중을 압도하는 모습이 많죠. 최근엔 전통 장승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감각을 입힌 장승도 만들고 있어요. 해학적인 웃음과 익살스러운 표정을 띤 탈과 접목한 새로운 장승을 선보일 때면 관객이 친근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김종흥 명인은 목조각장 및 하회별신굿탈놀이의 이수자이기도 하다.

장승은 돌이나 나무에 사람의 얼굴을 새겨서 마을과 절 어귀에 세운 조각품이다. 단순한 조각상의 의미를 넘어 이정 표이자 수호신 역할도 했다.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등 명문을 새겨넣고 길가에 세웠던 신상(神像)으로, 그 기원은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장생 (長生)’으로 불리기도 했던 장승은 산업화·도시화된 이후 그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장승은 한국의 토속문화로 역사적, 미적 가치가 있는 것인데 점점 사라져가는 것이 안타까웠어요. 한국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하회마을에서 태어나 그 영향을 받고 성장했기 때문에 우리 고유의 장승문화를 계승해야겠다는 사명감을 갖게 됐어요.”
창작 장승과 퍼포먼스로 저변 확대
김종흥 명인은 어린 시절부터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굿이나 풍물놀이에 끼어 북과 꽹과리를 치며 돌아다니길 좋아했고 손재주가 뛰어났다. 노래와 춤에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해 농악대회 같은 공식 행사에서 주목을 받았다. 젊은 시절에는 농사나 돈벌이보다 분재나 목공예를 하느라 생계 걱정을 하기도 했다. 하회별신굿탈놀이 이수자인 이상호 선생의 권유로 스님 탈을 쓰고 탈춤을 추던 그는 장터마을 중리에서 하회로 들어온 후 장승 만들기를 시작했다.
김종흥 명인은 세계 곳곳을 누비며 장승문화를 전파하고 있다. 올해 11월엔 미국 버지니아 주의 코리안 벨 가든 공원을 방문해 작품을 전시했다. (사진. 김종흥)

“하회마을의 쓸모없는 다랑논을 사서 농사를 지으면서 나무를 심었어요. 어릴 적 어깨너머로 배운 기술로 장승을 한 두 개씩 만들었죠. 30대 중반 무렵부터 전통 장승 깎는 일로 밥벌이를 했어요. 장승의 원형을 찾기 위해 발품을 팔아가며 관련 문헌을 찾아 읽고 전통 장승의 흔적이 있는 죽령, 상주 이안, 남장사 석장승 등지를 부지런히 답사해 전통 장승의 원형을 재현했어요. 1990년대에는 지금의 목석원 공원도 조성했습니다.”
장승문화를 계승하기 위해서는 보고 즐길 거리를 통해 저변을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전통 장승 조각에 이어 창작 장승 만들기와 퍼포먼스에도 도전했다. 양반과 부네의 얼굴을 하고 하회탈의 인자한 미소를 보여주는 창작 장승은 많은 사람의 눈길을 끌었고 장승 명인으로 알려진 계기가 되었다. 장승 만드는 과정부터 예술성까지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된 장승 퍼포먼스는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다이내믹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마당극처럼 펼쳐지는 탈춤처럼 장승 퍼포먼스는 짧은 시간 안에 관객과 호흡하며 즐기는 공연입니다. 그 때문에 대중을 사로잡는 스토리텔링과 연기력이 필요해요.” 별도로 퍼포먼스의 구성을 짜진 않지만 40여 년 동안 장승을 만들어 온 시간과 내공은 ‘극본 없는 명작’을 펼치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장승박물관 세워 전통문화 계승하는 것이 목표
커다란 체구에 부리부리한 눈, 큼지막한 주먹코와 성글고 뻐드러진 이빨을 드러낸 전통적인 장승의 모습은 위압적이지만 해학적인 요소가 담겨 있다. 장승장이의 솜씨에 따라 인자한 모습, 험상궂은 얼굴, 근엄한 표정, 익살스러운 모양으로 다채롭게 변화하는 장승은 최근엔 예술적인 조각품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의 손길을 탄 장승은 크기와 표정도 각양 각색이다. 장소 제한 없이 오래 두고 보아도 정감이 느껴진다. 그가 만든 장승은 칼 흔적이 붓 터치처럼 남아 있어 거칠고 투박한 매력이 있다.
“장승 만드는 과정은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장승의 재료가 되는 나무는 개와 닭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깊은 산, 양지바른 곳에서 베어 온 소나무를 주로 사용해요. 나무의 윤곽, 미관, 결에 따라 구도도 달리 잡고, 표정을 잡을 땐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한 후 마음에 꽂히는 상을 장승에 옮겨요. 나무 종류나 모양에 따라 구도를 잡아 윤곽을 뜨고 전체적인 미관을 고려하면서 끌과 망치로 조각합니다.”
左)하회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우리 고유의 장승문화를 계승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다. 右)그가 만든 장승에는 칼 흔적이 붓 터치처럼 남아 걸치고 투박한 매력이 있다.

그가 성심을 다해 조각한 장승은 모두 다른 표정과 형체를 가지며 독특한 분위기를 내뿜는다. 장승은 깎는 작업이 끝났을 때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치르고 지정한 장소에 세워진 후에야 비로소 완성된다. “조각을 마친 후에는 명문을 쓰고 장승의 눈에 생명을 불어 넣는 점안식과 성인식을 합니다. 장승의 옷을 입히는 채단식을 거행하고 머리를 세 번 부딪혀 합궁식을 치른 후 현장에 나가 장승을 세웁니다.”그가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열정을 쏟아 만든 장승은 국내 뿐 아니라 해외 각지에서도 볼 수 있다.
그 전환점이 되어준 것은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하회마을 방문 행사였다. 여왕과 생일 날짜가 같은 그가 장승 명인으로 함께 축배를 한 이후 그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이후 그는 일본, 미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 80여 회의 초청 공연을 펼치며 한국의 장승문화를 전파해 왔다. 올해 9월에는 한·벨 수교 120주 년을 맞아 벨기에 브뤼셀 국제만화축제에서 장승 퍼포먼스와 팬 사인회, 토크쇼 등을 펼쳐 주목을 받았다. 11월에는 미국 ‘코리안 벨 가든’(버지니아 비엔나 메도 보태니컬 가든 공원 내 위치한 한국식 정원) 완공 10주년을 맞아 장승 4개를 새로 건립하는 행사도 치렀다.
“장승과 함께 하회별신굿탈놀이와 안동의 역사도 널리 알릴 계획입니다. 장승 문화를 보존하고 계승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힘만으로는 부족해요.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과 지속적인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마을을 굳건하게 지키던 장승이 세계 곳곳의 어둠을 물리치고 다양한 문화를 지켜내는 수호자 역할을 하는 명물이 되길 바랍니다.” 앞으로 화회마을에 장승박물관을 세워 장승문화를 계승하고 싶다는 그의 꿈이 이뤄지길 기대해 본다.

EDITOR AE류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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