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어제와 오늘
늬들이 효종갱 맛을 알아?
'배달의 시작 그리고 진화'

우리의 삶에서 배달은 일상적인 문화이다. 예전에는 중국집 정도나 가능했던 '배달'이 지금은 거의 모든 것이 가능한 수준에 도달했다. 그런데 이런 배달의 역사는 최근에 불거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배달을 해 왔다.
효종갱, 배달의 시작
조선 후기 시인이자 관리인 최영년이 1921년에 쓴 『해동죽지』라는 책에 효종갱(曉鐘羹)이라는 음식이 나온다. 북벌을 주장한 효종과 관련된 음식이 아니라 새벽 효(曉)와 쇠북 종(鐘) 그리고 국 갱(羹)자를 쓰는 음식이다. 그러니까 새벽에 종이 울리면 먹는 국이라는 뜻의 효종갱은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에서 만들어진 음식이다. 콩나물과 배추속대에 송이버섯과 표고버섯, 소갈비, 해삼, 전복을 토장에 섞어 종일 푹 끓인 음식이다. 이걸 밤에 한양으로 보낸다. 남한산성에서 한양까지는 직선거리로도 20킬로미터나 된다. 거기에 당시에는 경강으로 불리는 한강까지 건너야만했다.



그러니까 아마 자정이 되기 전에 출발해야 했을 것이다. 오토바이나 철가방 같은 게 없을 때였으니, 항아리에 효종갱을 넣고 지게로 짊어지고 가야 했다. 이때 효종갱이 식을까 봐 항아리를 솜에 싸서 보냈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밤새 걸어서 새벽에 한양의 성문들이 열릴 즈음에 도착할 때까지 효종갱이 식지 않았다. 주고객은 아마 전날 과음을 한 양반들이었을 것이다. 들어간 재료부터 거리 그리고 배달에 인건비까지 감안하면 지금의 해장국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비쌌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효종갱을 먹기 위해서는 막대한 돈을 들여야만 했다. 효종갱의 다른 이름이 조선시대 부유한 양반들이 모여 살았던 북촌을 빗댄 북촌갱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자기 집 안방에서 쓰린 속을 달래 줄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장점이었다.
기록 속에 다양하게 등장하는 배달 관련 문화
배달의 장점은 그것을 먹거나 얻기 위해서 들여야 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그곳으로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엄청난 장점이었다. 따라서 효종갱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아주 오래 전부터 특히 음식을 배달시켜 먹으려는 시도가 있어 왔다. 문헌상으로 보면 의외로 배달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재 황윤석이 평생에 걸쳐서 쓴 일기인 『이재난고(?齋亂藁)』에는 영조 44년인 1768년,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갔다가 친구들과 함께 냉면을 시켜 먹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左) 효종갱(사진.한국의집) 右) 김준근<국수 누르는 모양> (사진.한국문화원연합회)

한 세대쯤 뒤인 1800년에는 순조가 달구경을 하다가 군사를 시켜서 냉면을 사오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정확하게는 배달보다는 포장 판매에 가까운 형태였지만, 이 시기쯤 배달이나 포장 판매가 비교적 익숙해지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 있다. 냉면과 효종갱으로 대표되는 조선시대 배달의 역사는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까지 꾸준히 이어진다.
1906년 천도교에서 창간한 일간신문인 『만세보』에는 그 당시 유명 음식점인 명월관의 광고가 실린다. 광고 내용은 단체의 회식이나 회갑, 혼례 같은 행사 때 필요한 분량을 요청하시면 거리에 상관없이 싼 가격에 모시겠다는 것이다. 배달이라기보다는 케이터링(Catering)에 가까운 편이긴 하다. 그렇지만 음식을 배달한다는 본질은 똑같다고 할 수 있다. 광고까지 실을 정도였다면 명월관의 배달은 일상적이지 않았을까.
기술과 문화가 변화하면서 달라진 배달 풍경
일제강점기에 접어든 후에는 냉면과 설렁탕이 주요 배달 품목으로 떠오른다. 거기에 속도를 더할 수 있는 자전거가 도입되면서 이전과는 달리 배달에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주문을 할 수 있는 전화 역시 배달의 발전에 한몫했다. 여름철에는 냉면이 상대적으로 많은 주문을 받았고, 찬바람이 부는 겨울에는 따끈한 국물로 속을 달래줄 수 있는 설렁탕이 인기를 끌었다. 설렁탕은 소의 온갖 부위를 넣고 끓인 음식으로 싼 가격 덕분에 주머니가 가벼운 사람들도 즐겨먹는 음식이었다. 자전거를 탄 배달부가 설렁탕이 올라간 목판을 한 손에 든 채 마치 묘기하듯 가는 모습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 당시 소설에서는 설렁탕을 배달하는 소년의 모습을 묘사하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左) <신윤복 필 풍속도화첩> 주사거배 (사진.문화재청) 右) 배달 만화 (사진.조선일보)

그러면서 한번에 설렁탕 80그릇을 배달할 수 있는지 내기까지 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1925년 8월 19일자 조선일보의 4컷 만화 ‘멍텅구리’에서는 한 손으로 자전거 핸들을 잡고, 다른 한손으로 설렁탕 그릇이 다섯 단 정도 쌓인 쟁반을 받치고 가는 배달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배달이 비교적 일상적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설렁탕 배달을 가던 멍텅구리가 똥을 나르던 리어카와 부딪치면서 벌어지는 바보 같은 상황을 담고 있다. 어떻게 보면 그 당시 배달부의 낮은 사회적 신분을 보여주는 풍경이기도 하다.
그 밖에 군산의 대표적인 제과점인 ‘이즈모야’의 경우에도 자전거에 빵을 싣고 배달을 가는 조선인 직원들이 있었다. 따라서 규모가 큰 서양식 제과점의 경우에도 배달이 일상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930년대에는 경성에서 인천으로 냉면을 주문하면 택시와 열차를 이용해서 배달을 하기도 했다. 육수는 주전자에 따로 담아 왔고, 그릇은 다 먹은 후에 배달부가 도로 가져가는 방식이었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배달이 늘어나고 다양화되면서 여러 가지 사건과 사고가 일어난다. 일단 적은 급여와 가혹한 노동환경에 지친 배달부들이 동맹 파업을 하면서 자신들의 처지를 호소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짜로 냉면 배달을 시켜 배달부들을 골탕 먹이던 사람이 체포되기도 했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이어온 배달의 역사는 광복 이후에도 이어졌으며, 오늘날 보편화된 일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기술의 발전을 통해 혁신을 거듭하고 있으며 현재는 무인 드론을 이용한 배송까지 시도되고있다. 이런 진화는 단순히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다양하게 시도되었던 배달의 역사가 존재했기에 가능했다. 배달의 편리함과 중요성을 오랫동안 몸소 터득한 우리의 마음이 그런 진화를 이끌어 왔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EDITOR AE류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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