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타박타박 걷는 문화유산 오솔길
망월(望月), 물의 나라를 비추다
'제천여행'

물을 다룰 줄 아는 민족은 흥했고 그렇지 못한 민족은 몰락했다. 물의 역사는 한반도에서 농경이 시작된 때부터 지금까지 현재진행형이다.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최고의 관개용 저수지인 제천 의림지는 지금까지 제 기능을 톡톡히 해 내는 유일한 저수지이다. 가을의 정점에 이른 이맘때 1,500여 년 전에 축조된 의림지와 청품문화재단지를 여행하며 선조들의 지혜를 들여다본다.
옥순봉과 옥순대교

우리나라 최고(最古)다운 풍모를 지니다
의림지는 용두산(870m)의 아늑한 품에 안긴 듯 고요하다. 봄에는 벚꽃과 수양버들이 푸지게 피고, 여름에는 송림이 넉넉한 그늘을 내어주어 더위를 식힌다. 단풍이 물드는 가을과 삭막한 겨울에는 생명을 이어갈 봄날을 기다리며 인고의 깊은 잠에 빠진다. 이처럼 의림지는 사계절 어느 때라도 그림처럼 아름답다. 옛사람들이 저수지 둘레에 ‘영호정’와 ‘경호루’를 만든 것도 의림지의 사계를 즐기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의림지의 본래 목적은 용두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막아 둑을 만든 농경을 위한 수리시설이었다. 삼한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김제 벽제골, 밀양 수산제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관개시설이다. 현재 의림지 둘레는 약 2km, 면적 15만 1,470m2, 저수량 661만 1,891m2, 수심 8~13m이다.
정확한 축조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신라 진흥왕 13년(552)에 유명한 악사였던 우륵이 처음 축조했다고 전한다. 우륵은 우리나라 3대 악성의 한 사람으로 가야금의 대가이다. 우륵이 의림지를 축조했다는 설화를 증명이라도 하듯 의림지에는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바위 ‘우륵대’와 그가 마셨다는 우물 ‘우륵샘’이 남아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길이 530척(尺)의 큰 방축으로 ‘의림제(義林堤)’라 하여 논 400결(結)에 물을 댄다”고 적혀 있다. 1결의 면적은 9,859.7㎡이므로 3,000평 정도 된다. 그 당시 제천의 전체 논 면적이 559결인 점을 고려한다면 70%이상의 논에 용수를 공급한 셈이다.
농경사회에서 의림지는 사회·지리적 기준이 되었다. 조선초기 것으로 추정되는 규장각 도서 『하삼도(下三道)』에 따르면 제천 의림지 서쪽을 호서(湖西)지방이라 하여 지역을 나누는 기준으로 삼았다. 또 의림지에는 선조들의 우주관이 투영되어 있다. 조선 후기 화가 이방윤의 서화첩 《사군강산삼선수석》에 표현된 의림지도는 정사각형으로 묘사되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라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우주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인공위성지도를 통해 확인해 보면 의림지의 모습은 전통 약탕기를 닮았다.
(左)저수량이 풍부하고 고즈넉한 명승 제천 의림지와 제림, 위치 충북 제천시 모산동241번지 외 (右)의림지의 명물로 유명한 용추폭포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고마운 저수지
의림지는 역사 속에만 머물지 않는다. 신문지면에 “낮은 저수율 탓에 전국적인 농작물 피해가 잇따르고 있지만 수천년이 지난 현재에도 수리시설 역할을 해 내고 있는 의림지 덕에 제천지역의 가뭄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다”라고 실리기도 했다(충청투데이 2012년 6월 22일 자 제19면 기사). 의림지가 수천 년을 지나오면서 아직도 건재한 이유는 수원(水原)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김종수 세명대 외래교수의 학술 논문집을 정리·보도한 충북일보 의림지 관련 기사에 따르면 “의림지의 수원으로 용두산의 계곡 수가 있고 더불어 저수지 맨 밑바닥의 기층부위에서 샘솟는 샘물 근원을 하나 더 갖고 있다”라고 한다. 이처럼 두 개 이상의 수원이 있었기 때문에 수량이 일정하고 수질 또한 깨끗하게 유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의림지의 풍부한 저수량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튼튼한 제방 축조와 수문 시설 등 앞선 토목기술도 필요했을 것이다. 의림지는 고대 수리시설 가운데 유일하게 해발 300m가 넘는 고지대에 자리한 데다 두 개의 저수지가 연결된 이중 구조라는 특징도 있다.
용추폭포 의림지의 명물 되다
의림지는 느릿느릿 걸어도 2시간이면 넉넉하게 걸을 수 있다. 이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호수 주변에 나무데크 산책로가 놓인 것과 용추폭포를 볼 수 있는 투명 유리 다리가 설치된 것이다. 유리 다리 위에서 30m 높이의 폭포를 내려다 보면 짜릿한 스릴이 느껴진다. 또 폭포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전망대에 서면 우렁찬 굉음과 함께 힘차게 쏟아지는 폭포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이곳 모산동 주민들은 수문을 개방하면 물 떨어지는 소리가 용의 울음소리처럼 들린다고 하여 ‘용폭포’ 혹은 용이 터져 죽은 곳이라 하여 ‘용 터지기’라고 부른다. 유리 전망대를 지나면 인공폭포 아래에 나 있는 인공 동굴을 지난다. 동굴 속에서 의림지를 바라보는 풍광도 그럴싸하다. 나무데크 산책로를 따라가면 저수지와 점점 멀어진다. 이후 솔밭공원을 지나 제2의림지라 부르는 비룡담저수지에 닿는다. 현대에 조성한 것으로 제천 농민들에게는 의림지만큼 소중한 존재이다.
(左)청풍문화재단지의 정문인 팔영루 (右)고려 충숙왕 4년에 지은 한벽루(보물)

청풍명월의 명맥을 잇는 청풍문화재단지
의림지는 제천시 중심 번화가에서 5km 남짓 떨어져 있다. 이런 의림지에 비해 청풍문화재단지가 있는 청풍면은 자동차로 40분 이상을 달려야 닿는 먼 곳이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와 신라가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다퉜다. 청풍이라는 이름이 정해진 때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이다. 조선시대에는 청풍이 충청도에서 유일하게 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고종 때는 군으로 승격되었다.
오늘날의 제천과 비교할 수 없는 ‘잘나가는 동네’였다. 그도 그럴 것이 청풍면은 남한강을 끼고 있어 농업이 발달한 데다 수로가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물로 흥했던 청풍이 물에 수몰될 위기에 처했다. 충주다목적댐 공사가 1978년에 시작된 것이다. 제천의 지도를 다시 그릴 만한 대역사였던 이 공사로 물에 잠긴 마을이 5개 면에 걸쳐 61개 마을에 이르렀다. 그중 청풍면은 27개 마을 중 25개 마을이 수몰 대상지였다. 이때 제천시가 청풍의 문화재와 가옥들을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망월산 자락에 옮겨 문화재단지를 조성했다.
청풍문화재단지 입구에 서면 포졸 형상을 한 모형이 수문장처럼 지키고 있는 팔영루를 마주한다. 원래 이름은 ‘남덕문’이었으나 고종 때 부사 민치상이 청풍팔경을 즐기기 위해 팔영시를 지은 뒤로 ‘팔영루’라 부른다. 도화리 고가, 후산리 고가, 지곡리 고가 같은 민가도 시대를 거슬러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단지 내에서 눈여겨볼 것은 고려 충숙왕 4년에 지은 보물 한벽루이다. 이 누각은 본채 옆에 작은 부속채가 딸린 형태로, 밀양 영남루, 남원 광한루와 함께 조선시대 누각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건물로 손꼽힌다.
한벽루 옆에는 관아 건물 중 하나로 손님이 머물던 응청각이 있다. 1층은 창고로, 2층은 난방이 가능한 방이다. 길을 따라 걸으면 관수정, 망월산성을 지나 망월루에 이른다. 망월산성은 망월산(373m) 정상에 돌로 쌓아 올렸다. 축성 방법을 보아 삼국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한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 따르면 이 성을 사열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망월산성으로 부르고 있다. 망월(望月)은 음력 보름날 밤에 뜨는 둥근달이다. 캄캄한 곳에 빛을 밝히는 망월의 아름다움과 고마움은 현대에 와서 더 절실하지 않을까. 망월이 빛나는 청풍호의 아름다움이 기대되는 가을이다.

EDITOR AE류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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