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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예술 영역을 개척하는 영원한 광대
'김덕수 사물놀이 창시자'

마음을 울리는 웅장한 북소리와 경쾌한 꽹과리 장단, 휘몰아치는 장구의 리듬과 공명을 그리며 멀리 퍼져나가는 징소리, 듣기만 해도 신명나는 사물놀이 한 판이 벌어지면 구경꾼들은 절정으로 치닫는 리듬에 한껏 빠져든다. 야외에서 펼쳐지던 사물 연주를 무대예술로 승화시켜 한국 전통 음악에 획을 그은 이는 사물놀이 창시자인 김덕수 명인이다. 64년간 음악 활동을 하며 느낀 신명과 환희를 전 세계에 전하고 있는 그를 만나 보았다.
무대예술로 승화된 우리 고유의 소리
국악 강습소와 악기 가게가 줄지어 있었던 종로 거리에 4명의 청년들이 모였다. 조선시대 ‘소리의 길’이라 칭했던 이곳에는 국악인들이 모여 음악 활동을 하던 ‘공간사랑’이란 건물이 있었다. 청년들은 이곳에서 듣기만 해도 절로 어깨춤이 나오는 신명나는 음악을 연주했다.김덕수가 장구를, 김용배가 꽹과리를, 최태현이 징을, 이종대가 북을 맡아 펼쳐낸 음악은 웃다리 풍물 가락을 음악적으로 긴장감 있게 구성한 곡이었다. 그들이 연주한 경쾌한 가락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78년 열정과 패기가 넘쳤던 청년들이 펼친 이날의 공연은 한국 전통예술의 역사를 새로 쓰는 혁명적인 문화선언으로 남았고, 공간사랑은 사물놀이를 처음 선보인 역사적 공간이 되었다.
김덕수는 사물 연주를 무대예술로 승화시켰다. 2020년 세종문화회관<김덕수傳> 공연모습

“사물놀이는 야외에서 이뤄지는 풍물놀이를 무대예술로 각색한 것입니다. 시각적인 놀이의 형식을 청각적인 데에 비중을 두고 음악 작업을 한 것이죠. 시대와 환경의 변화 때문에 마당에서 대규모로 펼쳐졌던 풍물놀이를 악기 연주의 감동을 오롯이 느낄 수 있도록 새롭게 창조해 무대에 올린 것이 사물놀이입니다.” 천둥번개 소리와 같은 강렬한 울림이 있는 꽹과리와 바람을 상징하는 징, 하늘을 둥둥 떠가는 구름 같은 북소리와 장대비가 쏟아지듯 휘몰아치는 장구의 리듬. 이렇듯 사물놀이는 자연의 소리를 닮은 원시적인 음악이기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전 세계 어디에서나 감동의 파장을 일으킨다.
김덕수 명인은 무대 위에서 사물놀이 공연을 할 때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비처럼 장단에 맞춰 장구를 힘차게 두드린다. ‘투두둑, 투두둑’ 처음은 봄비처럼 시작했던 그의 장구 소리는 절정에 다다를수록 폭우처럼 휘몰아치다 서서히 잦아든다. 세월의 무게가 얹어진 그의 어깨에서 나오는 장구의 리듬은 꽹과리와 북, 징소리와 조화되어 관객들의 마음을 파고든다.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며 펼쳐지는 사물놀이에는 그의 인생과 희로애락의 감정이 담겨 있다.
전 세계에 감동과 위로를 선사하다
“충청남도 조치원에서 남사당 난장(亂場) 트던 날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올라요. 아버지 손에 이끌려 남사당의 새미(무동) 데뷔한 날이었죠. 다섯 살 때였는데 인형극과 줄타기, 탈춤, 풍물 연주를 하던 남사당패 연주자들의 어깨 위에서 재주를 펴는 일을 했죠. 공연을 하며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니 천하가 내 밑에 있는 듯한 희열이 느껴졌어요.” 남사당패는 봇짐 하나 메고 장터를 돌아다니는 보부상처럼 전국을 유랑하는 전문 예인집단이었다. 우리나라 전역이 활동 무대였고, 만주까지도 영역을 넓혀갔다.
01. <김덕수傳>은 그의 데뷔 63주년을 맞아 만들어진 공연으로, <청준예찬>을 연출한 박근형이 각색과 연출을 맡았다.
02. 김덕수는 '국악 신동'으로 남사당 새미로 데뷔하며 우리 음악을 시작했다.
03. 이 시내 최고의 광대인 그는 세상 다하는 날까지 장구채를 잡겠노라 이야기한다.

“남사당이 공연을 하면 최소한 6가지 레퍼토리를 펼쳐요. 최소한 40명 이상으로 구성된 집단이자 최고 명인들이 모인 종합예술단이에요. 풍물놀이와 탈춤은 물론 인형극도 하고, 줄도 타고, 접시도 돌리죠. 1964년에 남사당놀이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됐지만 그 명맥을 오래 이어가지 못했어요.” 남사당패의 일원으로 인기를 얻은 그는 서울 국악예술고등학교에 입학해 국악을 배웠다. 이후에는 문화예술단에 들어가 일본 공연을 시작했다.
1968년에는 리틀앤젤스예술단과 함께 세계 공연에 나서기도 했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그는 해외 공연을 하며 우리 전통 음악을 세계화해야겠다는 의지와 사명감을 갖게 되었다. 공간사랑에서 사물놀이를 처음 선보인 이후 그는 1982년 미국 텍사스 주에서 열린 ‘세계타악인대회’에 출전해 신명나는 사물놀이를 펼쳤다. 관객들의 기립박수 속에 10여 차례의 커튼콜이 이어졌고 ‘세계를 흔든 한국의 소리’라는 극찬도 받았다.
“리듬은 만국 공용어라는 것을 세계타악인대회를 통해 느낄 수 있었어요. 폭발적이고 신들린 듯한 사물놀이에 열광하는 팬들도 많이 생겼어요.” 그 무렵 해외에서는 ‘김덕수 패’를 지칭하는 ‘사물노리안(Samulnorian)’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고, 다양한 국가에서 초청공연도 이어졌다. 세계적인 무대에서 공연을 하고 유명 아티스트와 교류를 하는 가운데서도 그는 국내 공연이라면 어디든 참여해 의미 있는 발자국을 남겼다. 1987년 이한열 추모굿 공연과 1990년과 1998년에 열린 평양 공연에 출연한 그는 사물놀이로 관객들에게 위로와 감동을 선사했다.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평양 공연은 꽹과리와 장구, 징, 북이 빚어내는 음악으로 금세 부드러워졌어요. 시간이 흐를수록 신명나는 분위기로 하나가 됐죠. 사물놀이를 통해 우리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고 남북평화에 기여하고 싶어요.”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도전과 혁신
사물놀이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는 그는 클래식, 재즈, 락 등 세계의 다채로운 음악과 다른 예술과의 융합으로 주목을 받았다. 특히 지난 2010년에는 디지털과 사물놀이가 조화된 ‘디지로그 사물놀이’로 관객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디지털과 환상적인 사물놀이 입체영상이 어우러진 이 공연은 미래에도 사물놀이가 여러 장르와 조화를 이루며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지난해에는 데뷔 63주년을 기념해 그의 예술 인생을 다룬 음악극 [김덕수傳](연출 박근형)이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남사당 새미(무동)로 데뷔해 광대의 길로 들어선 뒤 사물놀이를 탄생시키고 전 세계를 누비며 활동해온 그의 인생 여정을 2시간으로 압축해 보여준 이 공연은 코로나19로 지친 사람들에게 활력과 감동을 주었다.
“코로나19가 가장 인상적인 공연의 기억을 만들어줬어요. 관객들과 함께 호흡하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스마트폰이나 PC로 공연을 보며 관객들과 하는 소통도 즐거웠습니다. [김덕수傳]은 앞으로도 계속 업그레이드해 공연할 예정이에요.” 시대를 앞서가는 그는 힙합, 비보잉과도 콜라보를 하며 세계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정년 퇴임을 한 이후에도 원광디지털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사물놀이를 집대성하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후대가 우리 전통 음악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싶어요. 한류 문화의 근본인 ‘신명의 개론(槪論)’도 쓸 계획입니다. 또, 전 세계 음악 교실에 우리 악기를 도입해 사물놀이 수업이 활성화될 수 있는 기반을 만들 예정입니다. 그 토대 위에서 한국의 신명이 세계의 팝 문화로 자리매김하길 기대하고 있어요.” 국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은 김덕수 명인.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그의 새로운 도전이 한국 전통 음악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탄탄대로로 이어지길 바란다.

EDITOR AE류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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