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시대를 잇는 삶
풀 솔로 빚은 적후지공(積厚之功) 문화재 장인의 길
'표구공 문화재수리기능자 유정염'

문화재를 복원하는 일은 고난도의 전문 작업이다. 종류도 많고 익혀야 할 기술도 녹록지 않다.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도 두말할 나위 없다. 그래서 '기능'이나 '기술'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건 부족하다. 거의 '예'에 가깝다. 책과 그림을 보존, 복원하는 배첩(褙貼)도 그 하나다.
“익숙함과 경험에 기대어 자신을 다지는 노력이 결여된 성장은, 언젠가는 그 힘이 다하게 된다. 쌓고 쌓고 또 쌓는 반복과 성실함 그리고 한결같은 꾸준함이 축적될 때, 그 향기에 사람들이 들어와 너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 『장자』 제1편 소요유 中


그림에 빠진 소년, 그림을 살리는 길로 가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소년은 일찍부터 상경해 꿈을 키웠다. 외할아버지의 추천으로 그림을 가르쳐 줄 스승도 만났다. 하지만 서울 인사동을 찾은 소년은 전혀 다른 운명을 만났다. 생각지 않았던 일이었지만, 그는 그 운명에 푹 빠지고 말았다. 그건 바로 ‘배첩’이었다. “열여덟 살 때였어요. 그 당시 인사동을 오가면서 배첩 일을 접하게 되었죠. 흔히 ‘표구사’로 불리는 곳들이 많았습니다. 그림을 직접 그리는 일도 좋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실컷 만지고 볼 수 있다는 점이 더 매력 있었어요. 오히려 그 어떤 화가보다 더 많은 작품을 만나고 감상할 수 있어 호사였죠.”
전 만해문학박물관 관장이자 표구공 문화재수리기능자인 유정염 선생은 그렇게 배첩의 길로 들어섰다. 풀을 쑤는 일, 칼 갈이부터 차근차근 하나씩 일을 배워 나갔다. 주변의 어른들은 아직 어린 나이에 배첩 일을 시작한 그를 기특하게 여기고 많이 응원해 주었다. 배첩 일을 하면서 스님이나 서예가, 화가 등과 자연스러운 교분도 생겼다. 그 과정에서 그에게 ‘글 스승’이라 할 수 있는 남계 박진주 선생도 만나게 됐다.
“좋은 기회가 생겨서, 제 이름으로 가게를 낼 수 있게 됐어요. 마땅한 상호가 없을까 생각하던 차에 스승님께 ‘유아당’이라는 아호를 받았죠. 그 아호를 제 가게 이름으로 정했습니다. 맑은 집을 지어 나가라는 뜻이 좋았거든요.” 박진주 선생의 가호가 있던 걸까? ‘유정염’이라는 이름은 몰라도 ‘유아당’을 기억하는 사람은 점점 많아졌다. 일이 많아지는 만큼 그의 실력도 날로 좋아졌다. 그리고 그만큼 우리 고서적, 고화첩을 복원하고 보존하는 일에도 관심과 사명감이 깊어져 갔다.
左) 우현 송영방 작품 右)옥산 김옥진 작품

글과 그림을 완성하는 또 다른 경지, 배첩
배첩은 병풍, 족자, 전적 등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진다. 글씨, 그림의 아름다움은 물론이고 실용성과 보존성을 높여주는 전통적인 서화처리 방법이다. 한자를 풀어보면 배(褙)는 등[背]에 옷을 입힌다[貼]는 뜻이 된다. 현대인에게는 ‘표구’라는 단어가 더 익숙하지만, 우리 전통의 명칭은 분명하게 ‘배첩’이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인조실록』 19권에는 “배첩장은 건물을 수리할 때 도배군(塗褙軍)을 관리하고 주도하였던 장인이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어 “창덕궁 집경전(集慶殿)을 수리할 때 전각에 벽지를 발랐던 배첩장 김길(金吉)은 사역하여 금군을 제수받았고”라고 적혀 있다. 김길, 그가 우리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배첩장인 셈이다.
배첩 자체의 역사는 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병풍 그림을 보아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에 이미 이러한 기술이 있던 것으로 보이며, 신라와 고려를 거치면서 꾸준히 발전한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 조선 전기에는 도화서 소속으로 궁중서화의 처리를 담당하는 이들도 있었다. 형태와 제작 기법에 따라 족자, 병풍, 장정, 고서화 처리 등으로 나누는데 특히 족자는 서화를 벽에 걸어두고 볼 수 있도록 만든 두루마리 형태의 서화 처리 방법이다. 우리 전통 가옥의 실내 구조에 알맞은 형태이며 재단, 초배, 겹배, 건조, 삼배, 건조, 축목, 반달 부착 순으로 이루어진다. 현대에는 고서화 처리가 많은데 손상된 부분을 되살려내는 작업이기에 높은 안목과 세밀한 기술이 필요하다.
左) 각종 약 정보가 적혀 있는 고서. 현대의 의학서적에 해당하는 셈. 右)보견된 부분에 채색을 해 전체분위기를 맞추는 보채작업

이처럼 전통적으로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일인데도 용어의 정립이 아직은 혼란스럽다고 유정염 선생은 이야기한다. “배첩을 가리키는 용어가 혼용되고 있어요. 하지만 정확한 명칭은 배첩입니다. 표구는 일본, 장황은 중국에서 사용하던 말이라고 봐요. 배첩은 기록된 것만으로도 조선시대부터 그 명맥을 찾을 수 있고요. 배첩이라는 이름을 되찾는 게 우리 전통문화의 뿌리를 살리는 거라 생각합니다. 무형문화재는 배첩장으로 부르는데, 기능자는 ‘표구’로 표현하는 것도 좀 맞지 않죠.”
물론 언어라는 건 시대에 따라 많은 사람에게 익숙한 방향으로 변화하기 마련이다. 인사동 거리에 나가면 쉽게 눈에 띄는 건 ‘표구사’라는 간판이다. 이런 대중의 인식을 바꾸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우리 문화재를 또렷이 알려야하는 위치에 있는 이들이라면 용어 사용도 신중해야 한다”라고 유정염 선생은 설명을 덧붙였다. 일반인이 보기에는 그저 명칭에 지나지 않을 일에도 유정염 선생은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역사적인 맥락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 문화재를 온전히 보존하고 알려야 하는 이로서의 책임의식이기도 하다. 원본의 생명을 되살리듯, 우리 전통문화 되살려야
“사라질 수 있는 문화재도 보수하고 보존처리하면 더 오랜 세월을 두고 볼 수 있죠. 잘 남아있는 고서화를 볼 때 느끼는 것이 우리 조상들이 참 훌륭하셨다는 겁니다. 그런 만큼 후손인 우리가 인내심을 갖고 정교하게 해야 하는 일이에요.” 『장자』 제1편 소요유에는 “익숙함과 경험에 기대어 자신을 다지는 노력이 결여된 성장은, 언젠가는 그 힘이 다하게 된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반복과 성실함 그리고 한결같은 꾸준함이 축적되어야 한다는 말도 있다.
左) 반복과 성실함 그리고 한결같은 꾸준함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右)영친왕 이강공의 글씨액자 복원 전(위), 복원 후(아래)

유정염 선생은 배첩을 할 때 그런 마음가짐으로 임한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배첩장도 이러한 막중한 책임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승정원일기』 현종 11년의 기록을 보면, 불에 타 훼손된 선대 어진을 배첩장이 보수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당시 왕의 얼굴 그림이 훼손된 것이니 그 일을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았을 것은 분명하다. 유정염 선생은 배첩 일을 하면서 관련 문헌 기록, 역사적인 자료를 찾아 직접 공부해 나갔다. 전문가로서의 직업의식과 우리 전통 문화를 이어가는 이로서의 책임감이 시너지를 일으킨 셈이다. 그 덕분에 기능자로서는 흔치 않게 문화재전문위원까지 맡게 됐다.
유정염 선생이 지금 관심을 두는 일은 두 가지. 하나는 후학 양성이다. 그는 얼마든지 기술을 전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또 하나, 고향 진도에 박물관을 여는 것. 15년 전부터 1만여 권의 시서화집과 수천 점의 시화를 모으고 있다.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역시 전통문화의 뿌리를 되찾는 일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의 바른 맥을 이을 수 있도록 많은 이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 유정염 선생의 그 바람이 이루어지길 기대해 본다.

EDITOR AE류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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