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타박타박 걷는 문화유산 오솔길
전성기, 그 화려한 시절의 기억 찬란한 문화를 일군 논산의 날들
'예학의 중심지 논산'

한 지역이 가장 강한 이미지는 때때로 다른 면모를 덮어 버리기도 한다. 연무대로 인해 군사도시라는 인상이 깊이 새겨진 논산은 구석구석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오랜 역사를 관통하며 다양한 이야기가 깃든 여행지가 가득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유구한 시간을 이어온 논산으로 기분 좋은 소풍을 떠나 듯 나선 기행에는 사뿐사뿐 봄이 동행했다.



위엄을 내려놓은 친근한 석조미륵불과의 조우, 관촉사
마음에 쌓인 티끌을 말끔히 씻어내고 싶은 순간이 있다. 조용히 기대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공간은 그런 순간 너무나 큰 위로가 된다. 논산 시내에서 머지않은 곳, 반야산기슭에 자리한 고찰 관촉사는 고즈넉한 절집 풍경을 가진 곳으로 고려 전기 승려인 혜명이 창건했다.
관촉사에 가려면 겸허히 몸을 낮춰야 통과할 수 있는 해탈문을 지나야 하는데 이 좁은 문을 통과하면 너른 절 마당이 모습을 드러낸다. 차분히 걸음을 옮겨 대웅전 앞에서 부처의 세계에 시선을 두었다가 고개를 돌려 병풍처럼 둘러선 산 앞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압도적인 규모의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323호)을 마주하게 된다.
위엄으로 무장한 모습이 아닌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듯한 자비로운 표정의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높이가 18.12m에 달하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불상이기도 한데 크기뿐만 아니라 희소성과 예술성, 역사성 측면에서 귀한 가치를 지닌다. 머리에 원통형의 높은 관(冠)을 쓰고 있고 그 위에 이중의 네모난 모양으로 머리 위를 가리는 덮개가 표현되어 있으며, 모서리에는 청동으로 만든 풍경이 달려 있는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얼굴이 넓고 큰 편으로 긴 눈, 넓은 코, 꽉 다문 입 등 뚜렷한 이목구비가 토속적이고 푸근한 느낌을 전한다.
덕분에 관촉사에서는 편안히 마음을 내려놓고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며 진군해오는 봄의 기운을 느껴볼 수 있다. 평화로운 관촉사 절 마당에서 따스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한 봄햇살을 마음껏 들이켠 후 윤장대를 돌리며 덕도 쌓고, 석등(보물 제232호) 앞에서 바람을 담은 기도를 올린 후 세심(洗心)의 상태로 다음 여행지로 걸음을 옮길 수 있다.
左) 관촉사 대광명전 右)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323호) 관촉사 위치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로1번길 25 문의 041-736-5700

예학의 산실이 된 사학의 구심점, 돈암서원
조선시대 교육의 중요한 축을 담당했던 우리나라의 서원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2019년 총 9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중 한 곳인 돈암서원은 1634년(인조 12)에 창건한 곳으로 조선 중기 대표적인 유학자인 사계 김장생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
예학의 종장인 김장생의 후학들이 세운 만큼 돈암서원은 예학의 산실이 되어 수많은 학자를 배출하며 그 역할에 충실했다. 유생들의 걸음을 좇으며 둘러보는 돈암서원에서는 고요함 속에 깊이 내려앉은 짙은 묵향이 느껴지는 듯했다. 규모있게 세워진 유생들이 공부하던 응도당(보물 제1569호)에서는 켜켜이 내려앉은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났다.
긴 세월 유생들과 함께하며 청운의 꿈을 꾸는 공간이 됐을 응도당은 섬세하게 장식된 화반과 굳건히 학문의 길로 향하는 유생을 받쳐 주는 듯한 주춧돌이 인상적이다. 규모나 구조적인 면모가 한국의 대표 서원다운 돈암서원 응도당과 더불어 이곳에서 꼭 둘러봐야 할 것이 바로 내삼문 담장이다. 제항을 지내는 출입문이었던 내삼문 담장을 유심히 살펴보면 독특한 글자를 볼 수 있다.
左) 돈암서원 거경재와 정의재 右) 제항을 지내는 출입문인 내삼문 돈암서원 위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3길 26-14 문의 041-733-9978

‘지부해함(地負海涵), 박문약례(博文約禮), 서일화풍(瑞日和風)’이라는 12개의 글자를 새겨놓은 것인데 이는 예학의 정신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지부해함은 ‘땅이 온갖 것을 등에 지고 바다가 모든 물을 받아주듯 포용하라’라는 뜻이고, 박문약례는 ‘지식은 넓히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하라’는 의미이며, 서일화풍은 ‘좋은 날씨 상서로운 구름, 부드러운 바람과 단비 즉,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웃는 얼굴로 대하라’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예학의 정신을 마음에 새기며 후세에 이토록 좋은 가르침을 전한 선조에게 감사의 인사를 고하며 돈암서원에서의 시간을 갈무리했다.
풍요의 시대를 관통한 날들의 기록, 강경근대역사문화거리
시간의 흔적을 이고 선 거리는 고요하기만 하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내려앉은 거리 곳곳에서는 한 시절을 풍미한 풍요의 흔적이 묻어났다. ‘조선 2대 포구, 3대 시장’이었다는 강경의 이야기다. 번성의 시기가 지나가버린 강경은 조용한 포구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지나온 시간의 흔적은 퇴색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풍요의 기록처럼 여전히 강경에 자리 잡고 있는 구 한일은행 강경지점(국가등록문화재 제324호)을 비롯해 구 강경노동조합(국가등록문화재 제323호), 강경성지성당(국가등록문화재 제650호) 등이 굳건히 모습을 지키며 강경근대역사문화거리를 빛내고 있다.
左) 강경근대역사문화거리에 있는 이정표 右)일본 목구조 양식을 띤 구 강경노동조합(국가등록문화재 제323호)
강경근대역사문화거리 위치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옥년봉로 일원 문의 041-745-3444(강경역사관)

현재를 걸어 과거로 닿는 시간이 교차하는 강경근대역사문화거리를 걷다 보면 쇠락해 박제된 공간 사이로 희망차게 미래로 향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데우고 있는 힘이 느껴진다. 강경의 오늘은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콘텐츠를 생산하며 성장 에너지를 부지런히 생성하고 있는 것이다. 보물 찾기 하듯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강경근대역사문화거리를 걷다 보면 숨어 있는 풍경을 종종 만나게 된다.
근대역사전시관, 스승의 날 발원지인 강경여자중고등학교, 박범신 작가 소설의 배경이 된 집 등이 바로 그런 곳들이다. 그리고 여전히 포구로서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즐비한 젓갈판매점이 강경의 번성함을 과시한다. 과거의 풍요를 발판 삼아 새로운 부흥을 꿈꾸는 강경의 오늘은 여전히 빛나고 있다.

EDITOR AE류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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