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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에서 피어나는 화려한 불꽃
'국가무형문화재 제109호 화각장 보유자 이재만'

부드럽고 화사한 색감이 돋보이는 화각 작품은 화려한 멋을 자랑한다. 전통 화각공예 방식으로 용과 학, 꽃을 정교하게 그려 넣은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기품이 느껴진다. 이재만 국가무형문화재 제109호 화각장* 보유자는 사라져 가는 우리나라 화각공예의 명맥을 잇기 위해 오늘도 거친 수소의 뿔을 섬세한 손길로 다듬으며 열정을 꽃피우고 있다.
* 화각장(華角匠) - 화각공예가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고려시대 나전칠기인 경함(經函)과 염주합(念珠盒)에는 복채기법으로 된 대모(玳瑁)가 나전과 같이 사용되었고, 이러한 기법은 조선 전기와 중기의 나전에까지 이어졌으나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화각으로만 장식한 화각공예품이 발달하였다.



사라져 가는 화각공예에 생기를 불어넣다
화각공예는 쇠뿔을 얇게 갈아 뒷면에 무늬를 그려 장식하는 공예품이나 그 기술을 말하며, 화각 일을 하는 장인을 ‘화각장(華角匠)’이라고 부른다. 화각공예는 중국의 당나라 시대부터 있었던 대모복채(玳瑁伏彩) 장식 기술에서 전해 내려왔다. 거북 등딱지를 갈아서 뒷면에 그림을 그리는 이 방식은 통일신라로 유입 된 이후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국내에는 화각공예의 기원을 증명할 유물도 문헌도 없습니다. 화각공예품은 왕실에서만 사용하다 보니 수량 자체가 많지 않죠. 국내에 전해진 것은 18세기 이후 유물 몇 점만 존재하고 남아 있는 게 거의 없어요. 일부가 프랑스와 북한 박물관에 있고 일본의 개인 소장가가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을 뿐이죠. 연세 많은 어르신도 자개장은 알아도 화각장은 거의 모르는 현실이 안타까워요.”
생계조차 잇기 어려운 현실에 절망했을 때도 있었지만 우리나라 화각공예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과 사명감에 화각장(華角匠) 길을 포기하지 않고 걸어온 이재만 선생이 화각공예의 역사를 들려주었다. 그의 말대로 화각공예는 일본의 고대 보물 창고인 ‘쇼소인(正倉院)’에 소장된 통일신라시대의 대모복채칼집에서 그 발자취를 살펴볼 수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나전칠기의 자개무늬와 함께 사용된 대모전(玳瑁鈿)에서도 화각공예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고려시대 중기 이전에 성행했던 거북 등딱지를 활용한 기법은 대모 수급이 원활하지 못해 점차 쇠퇴했다. 대모가빗과 장신구, 한방 약재로 사용처가 증가하면서 대체 재료가 필요했다. 18세기 이후에는 대모 대신 쇠뿔[牛角]을 이용한 화각공예가 발전했다. 쇠뿔로 만든 화각공예품은 습기와 내구성에 약하기 때문에 보존이 어렵다. 18세기 이전의 것으로 판단되는 유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쇠뿔을 활용한 화각공예의 출발은 18세기 즈음으로 추정한다.
01. 삼층장 90x45x170 02. 아홉 칸으로 나뉜 목기인 구절함 03. 좌경 34x25.5x24

절망 속에서 꽃피운 희망과 열정
우리나라 전통 화각공예 기술이 지금까지 전승될 수 있었던 것은 작고한 음일천 선생의 공이 크다. 음일천 선생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쇠뼈를 다듬는 각질장(角質匠)이자 대모공장(玳瑁工匠)이었다. 대를 이어 기술을 연마한 그가 1970년대 초까지 꾸준히 활동하며 제자를 양성한 덕분에 화각공예가 전해질 수 있었다.
이재만 선생이 음일천 선생에게 화각공예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신문배달을 하는 친구의 소개로 16세부터 음일천 선생의 공방에 나가면서부터이다. 사실 이재만 선생은 어릴적 홍역으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으며, 걸음마도 떼지 못했던 시절 화로를 잘못 짚어 두 손이 눌어붙는 사고를 겪기도 했다. 오른손 엄지와 약지만 남겨놓고 손가락을 잃는 큰 사고였다. 그렇지만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과 그림을 그리는 천부적인 재능이 음일천 선생의 공방에서 빛을 발했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스승은 그를 향한 애정을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늘 곁에 두고 화각공예를 가르쳤다.
하지만 자유롭게 살고 싶었던 이재만 선생에게 스승을 수발하며 소뿔을 골라내 다듬고 밑그림을 그리고, 색을 입히는 과정은 지난하고 까다로웠다. 그것들은 어느새 숨 막히는 일상이 되었다. 그 때문에 20대에는 만화도 그리고 방송사의 분장사 일을 하는 일탈도 감행했고, 영화관 간판 그림을 그리면서 방황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안정된 생활 기반이 되어주진 못했다.
“긴 방황 끝에 화각이 천직이란 것을 깨닫게 됐어요. 화각공예에 인생을 바치기로 결심했죠. 사비를 털어 해외에 있는 우리나라 화각 유물 자료조사도 하고 프랑스 기메 동양박물관을 찾아가기도 했어요. 그곳에서 소장하고 있던 조선시대 화각장을 복원해 주기로 하고 전통 화각공예 기법을 꼼꼼하게 파악했어요.”
그가 해외 각지를 돌아다니며 열정을 쏟은 이유는 우리나라 전통 화각공예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과 어떻게든 명맥을 이어가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부모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했던 스승과 항상 그리운 존재인 어머니의 죽음도 그의 삶에 전환점이 되어주었다. 그는 화각공예를 끝까지 지켜 달라는 스승의 유언을 마음 깊이 간직한 채 화각공예품 제작에 전념한 결과 1974년 동아공예대전에 입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세계공예가협회 주최로 인도에서 열린 전시회에 그의 작품이 초대돼 이름을 널리 알리는 기회도 얻었다.
아내를 만난 후에는 인천에 공방도 마련하고 두 아들에게 화각공예 기술도 전수했다. 인도에서 연 첫 전시 이후 그는 미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 독일, 중국 등에서 활발하게 작품을 전시하며 우리나라 화각공예의 아름다움을 전파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1996년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09호 화각장 보유자가 되었다.
(左) 완성된 먹선화에 채색. 작업을 하는 이재만 선생 (右) 이재만 선생은 다양한 세대가 공감할 수 있도록 화각공예의 명맥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화각공예의 대중화를 위한 끊임없는 노력
화각장은 색감과 문양이 화려하지만, 막상 방 안에 두고 보면 단아하고 소박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각기 다른 색감과 문양이 하나로 조화돼 생활 모습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왕실 공예다운 화려함이 돋보이는 화각 작품은 바느질함과 베갯모, 빗, 실패 등 아기자기한 소품이나 가구로도 쓰여 친숙한 느낌도 있다. 하지만 그 공정만큼은 30여 단계나 될 정도로 까다롭고 정교하다. 2~3년생 수소의 뿔을 얇게 갈아낸 다음 각지 표면에 먹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오방색과 간색의 안료로 색을 입힌다. 채색이 완료되면 그림을 뒤집어 목기에 부레풀 접착제를 바르고 나무에 각지를 뒤집어 붙인다.
“화각공예를 할 때는 주로 풀을 먹고 자란 황소의 뿔을 사용하는 것이 좋지만 요즘은 전국을 다녀도 투명도가 높고 단단한 황소 뿔을 구하기 힘들어요. 재료를 구하는 것부터 완성되기까지 어느 것 하나 쉽지 않기에 몇 개월에 걸쳐 작품을 완성했을 때의 뿌듯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커요. 내년에는 전통 화각공예 기법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대작을 완성하고 싶어요.”
전통공예의 재현에 그치지 않고 가전이나 자동차, 지하철 연결 통로 등 일상생활에 화각공예를 접목하고 싶다는 그는 앞으로도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으로 화각공예의 명맥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후진을 양성하는 것은 혼자만의 열정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하는 이재만 선생. 그의 바람대로 우리의 생활과 교육현장 곳곳에서 전통 화각공예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력이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EDITOR AE안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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