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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냐 기능이냐
'리얼리즘으로서의 전통'

최근 다양한 예술가들이 전통과 현대를 잇고, 재해석하는 작업을 펼쳐 나가고 있다. 우리 문화의 전통적인 매력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담아낸 작품들이 많은 주목을 받기도 한다. 특히 단순히 외형을 흉내 낸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의미와 맥락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이 눈에 띈다.
01. <민족건축론> 김홍식, 한길사, 1987 02. ‘골드 카모’ 시리즈. 김홍식, 나무 위에 금박과 옻칠, 2017 ?최범 03. ‘8’ 시리즈. 김홍식, 스테인리스 철판 위에 나전과 옻칠, 2017 ?최범

전통 계승의 방법
“예컨대 학교를 짓는다고 할 때 옛날의 학교가 지닌 기능, 그 배치 및 형태 등과 그 이후의 변화를 이해하고서, 현재의 학교가 그 기능에 있어서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이해해야만 진정한 의미의 전통이 계승된 학교를 지을 수 있다. 아무리 새로운 기능의 건물이 근대에 와서 생겨났다고 할지라도 그것의 원시적인 상태로서의 모양이 전시대에 존재하는 것이며, 이러한 공간이 분화하면서 확대된 것이 바로 근대화의 방향이다 (김홍식, [민족건축론], 한길사, 1987, 363쪽).”
한국 건축 연구자 김홍식 교수는 전통의 계승을 형태가 아니라 기능의 변화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형태는 대상을 시각적으로 가장 잘 인식시켜 주기 때문에 동일성과 연속성을 확보하기가 용이하다. 하지만 형태만을 계승하는 것은 정작 그러한 형태를 산출한 구조와 배경을 무시하고 피상적인 모방과 답습에 빠지게 만든다. 문화적 정체성의 표현에서 어떤 형태의 원형적 요소를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겠지만, 거기에만 매달리게 되면 역시 그 형태의 본질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전통을 계승한다고 할 때 과연 무엇을 대상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전통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접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형태와 기능도 마찬가지이다. 전통을 형태로 이해하는 것과 기능으로 이해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물론 둘 다 가능한 방법이지만, 그동안의 지나친 형태적 접근이 전통에 대한 피상적 인식을 초래했다면, 이제는 그와 다른 관점의 기능적 접근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김홍식 교수의 지적처럼, 기능적 접근은 형태적 접근과 달리 무엇보다도 과거와 현재의 비교사적 인식이 필요하다.
아비뇽의 아가씨들(Les Demoisellesd'Avignon), 파블로 피카소, 1907

이종교배와 전통
벌거벗은 다섯 명의 여자가 도발적인 자세로 관객을 바라보고 있다. 그중에서 두 여자의 얼굴은 아프리카 가면을 닮았다. 최초의 입체주의 작품으로 평가되는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아프리카 미술의 영향을 잘 보여준다. 20세기 초 유럽의 미술가들은 가면과 조각 같은 아프리카 미술에서 새로운 감각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유럽 미술에서 볼 수 없는 원시적 생명력이 살아 있었다. 따라서 당시 유럽 미술가들은 ‘늙은’ 유럽 문화와 미술을 회춘(?)시켜줄 정력제를 아프리카 미술에서 찾았던 것이다.
‘늙은 유럽’과 ‘젊은 아프리카’라는 대비 속에 서구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의 전유(專有)라는 메커니즘이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러한 구도를 통해서 문화의 기능전환(Umfunktionierung)을 꾀한 것이기도 했다. 피카소의 작품은 아프리카 미술의 원시적 형식을 빌려 현대 유럽인의 야만성을 드러낸 것으로서 뛰어난 문화적 이종교배(異種交配)의 사례로 꼽을 만하다.
우리는 이러한 이문화(異文化) 간의 교류를 통해서도 형태를 넘어선 기능의 새로운 작용을 찾아볼 수 있으며, 이 또한 전통 계승의 한 방법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원래 ‘형태와 기능’이라는 화두는 서구 모던 디자인의 것이지만, 이를 문화 전반에 확대시켜 적용해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전통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左) 김홍식, 세계는 너의 것(The World is Yours), 병풍, 2019 ?최범 (右) 김홍식, 원(Won). 한지 위에 금박과 수채, 먹, 2020 ?최범

리얼리즘으로서의 전통
M-203 유탄발사기, 우지 기관단총, 베레타 권총… 화조(花鳥)와 기암괴석 대신에 각종 총기류가 장식되어 있다. 최근 홍대 앞 ‘서드뮤지엄’에서 열린 김홍식 작가의 개인전 ‘Faith’(10월 10일~11월 8일)에 전시된 병풍 그림이다. 서두에서 인용한 김홍식 교수와 동명이인인 작가 김홍식은 팝 아티스트이다. 작가 김홍식은 대학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하고 한동안 그래피티 작업에 몰두하다가 얼마 전부터는 팝 아트 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오래전부터 전통에 관심을 갖고 민화와 단청 등을 공부해 왔다. 2017년에 개최한 개인전 ‘벌기 위한 기도(Pray for Money)’에서는 옻칠과 금박을 사용한 작업을 선보였고 이번에는 단청과 병풍을 응용한 작품을 보여주었다.
김홍식의 작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선비의 고상한 아취를 담은 병풍과 민중의 진솔한 삶을 드러낸 민화를 흉기로 도배한 그는 전통의 파괴자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김홍식이 전통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사실 그의 작업은 단청과 금박, 옻칠의 재료와 기법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전통적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그러한 형식을 통해 표현하고 있는 것은 ‘8’과 같은 기복적인 숫자, ‘원(Won)’과 같은 화폐 기호 그리고 총기류 등이다. 이것들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돈과 권력이다. 우리들이 숭배하는 그런 것들 말이다.
그렇다. 김홍식의 작업은 형식에서는 매우 ‘전통적’이지만 그러한 형식을 통해서 표현하는 것은 매우 ‘현대적’이다. 이것이 그의 작업의 핵심이다. 김홍식에게 단청이나 금박, 옻칠은 전통의 일부, 아니 외형일 뿐이다. 그가 진짜 계승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전통의 외형이 아니라 기능이다. 그러니까 전통사회에서 병풍화나 민화가 사용되던 의미와 맥락 말이다. 그것들은 모두 당대의 욕망을 표현했다. ‘입신양명(立身揚名)’, ‘수복강녕(壽福康寧)’, ‘부귀다남(富貴多男)’ 등이다.
김홍식은 전통미술이 그러한 가치들을 담고 있다면 현대미술은 현대의 가치를 담아내야 한다고 믿는다. 김홍식은 전통미술의 형식이 아니라 기능을 계승하고자 한다. 전통의 형태적 계승이 아닌 기능적 계승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도달한 것은 흥미롭게도 “그것은 그 시대에 존재해야 한다(Il faut être de son temps)”라는 리얼리즘의 교의이다. 이쯤 되면 놀랍게도 리얼리즘이야말로 전통의 핵심이 된다. 왜냐하면 당시의 욕망에 충실했던 전통미술이 당대의 리얼리즘이라면 현재의 욕망에 충실한 김홍식의 작업은 현대의 리얼리즘이 된다. 그런 점에서 김홍식의 작업이야말로 현대 민화이자 코리안 팝 아트인 것이다.

EDITOR AE안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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