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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의 즐거움과 정성이 깃든 조선의 병과(餠菓)
'국가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궁중음식(궁중병과) 보유자 정길자'

연회의 과정을 생생하게 기록한 『의궤』에는 궁중병과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조선의 마지막 상궁 한희순과 그 뒤를 잇는 황혜성 선생의 전수로 그 궁중병과(宮中餠菓)를 재현해 생명을 불어넣은 이가 정길자 국가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궁중음식(궁중병과) 보유자이다. 오랫동안 병과를 연구하고 세계에 알려온 정길자 선생이 전하는 조선의 병과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조선왕조궁중음식(朝鮮王朝宮中飮食) 궁중병과’는 조선왕조 궁중음식으로 고종과 순종을 모셨던 마지막 수라상궁 한희순으로부터 구한말 실제로 궁에서 만들어지던 궁중음식의 종류 및 구체적인 조리 방법 그대로를 전수받아 계승한 국가무형문화재다. 그중 병과류는 전통 떡과 과자에 해당한다.
소박하고 정갈하지만 다양한 이야기가 담긴 조선의 병과
예로부터 잔칫날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음식은 바로 떡이다. 떡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쌀을 고운 쌀가루로 만들어야 한다. 고물로 쓰이는 팥, 콩, 견과류 등을 준비하는 것은 물론이고 둥글고 투박한 시루도 준비해야 한다. 재료 준비부터 색색의 고물을 묻혀 상에 올리기까지 손도 많이 가고 시간도 오래 걸리지만, 간편한 디저트가 많은 요즘도 떡은 잔치 음식의 대명사로 꼽힌다.
(左) 조선왕조궁중 음식은 그 종류가 너무 많아, 현재는 궁중음식과 궁중병과로 나누어 각각 한복려·정길자 원장이 보유자로 되어있다. 궁중병과는 떡과
과자류에 해당한다(ⓒ궁중병과연구원).
(右) 『음식디미방』, 『규합총서』 등 옛 기록에도 남아 있는, 우리나라 전통 유밀과의 한 종류인 약과(ⓒ궁중병과 연구원).

“요즘은 떡의 색과 모양도 다양해지고 한입 크기로 아기자기하게 만들어져 옛날과 비교할 수 없지만, 조선의 병과는 소박한 모양과 맛, 정갈함을 느낄 수 있는 궁중음식이에요. 디저트가 아닌 병과 그 자체로서 특별한 날에만 맛볼 수 있는 진귀한 음식이었죠.”
조선의 떡과 과자가 전통에만 머물지 않고 새로운 모습으로 진화를 거듭할 수 있었던 것은 정길자 (사)궁중병과연구원 원장이 국가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궁중음식 3대 보유자로 우리 고유의 병과를 연구해 온 덕분이다.
『진연의궤』에는 조선시대 궁중의 연회 음식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100여 명의 대령숙수(궁중의 남자 조리사)가 잔칫상 준비하는 과정이 나온다. 이 기록에도 떡은 잔치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 떡의 기원은 삼국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요. 삼국시대 이전에 사용했던 시루가 유물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학자들은 떡의 시초가 그 무렵부터 시작된다고 말하죠. 고구려 고분에도 떡을 찌는 시루 그림이 등장하고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도 떡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 떡이 우리 음식문화에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한과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수로왕묘의 제수에 ‘과(菓)’라는 표현이 나온다. 과일이 없는 철에는 곡식 가루로 과일 모양을 만들어 사용한 것을 과자의 시초로 보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차를 마시는 풍습이 상류층에 퍼지기 시작하면서 떡과 과자가 발전했다. 사치풍조를 억제하던 고려시대에는 잠시 위축됐으나 조선시대 들어와서 궁중의 병과는 150여 가지로 종류가 많이 늘어났다.
스승의 뜻을 이어 궁중음식의 명맥을 잇다
정길자 원장이 조선의 병과를 연구하고 국내 및 해외에 널리 알리는 데에는 스승인 황혜성 선생의 역할이 컸다. 일본 교토여자대학을 졸업하고 숙명여대 가정과 교수로 부임한 황혜성 선생은 학생들에게 한식을 가르치기 위해 수소문 끝에 낙선재를 찾았다.
황혜성 선생은 조선의 마지막 상궁들이 머물던 낙선재에서 한희순 상궁을 만난 후 조선시대 궁중음식을 전수했다. 그 인연은 정길자 원장이 1967년 한양대학교 가정학과 1기로 지원하면서 이어진다. 면접에서 스승 황혜성 교수를 처음 만났다. 수도여고를 졸업한 정길자 원장은 황혜성 선생의 맏딸인 한복려 원장과도 동기였기 때문에 인연의 뿌리가 깊었다. 스승과 제자로 시작된 인연은 조선의 궁중음식이 현대의 삶 속에 뿌리내리는 계기가 됐다.
30년 동안 한희순 상궁에게 궁중음식을 배운 황혜성 선생은 1971년 한희순 상궁이 국가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궁중음식 1대 보유자로 지정되도록 했다. ‘음식은 문화재가 될 수 없다’는 편견도 있었지만, 그 계보는 2대 황혜성 선생, 3대 한복려·정길자 원장으로 이어졌다. 정길자 원장은 현재 (사)궁중병과연구원에 재직하며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다.
“한양대학교 가정학과를 졸업한 이후에도 황혜성 선생님과 인연은 계속됐어요. 경주관광교육원·한국의 집·궁중음식연구원에 근무할 때도 이어졌지요. 돌이켜보면 그때 떡을 가장 열심히 만들었던 것 같아요. 그 시절에는 아파트에 거주하지도 않았고 가스레인지도 없어 궁중음식을 만드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석유풍로 위에 시루를 얹어 떡을 만들고 가족, 친척들과 함께 나눠 먹었어요.”
두텁떡. 두텁떡은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에도 등장한다. 화려하진 않지만 수수한 품격이 있다(ⓒ궁중병과연구원).

150여 가지가 넘는 궁중병과 중에서 정길자 원장이 가장 애착을 갖는 떡은 두텁떡이다. 두텁떡은 거피팥을 쪄서 계피와 간장, 꿀을 넣고 볶아 만든 고물을 시루에 뿌린 다음 찹쌀가루를 한 수저 놓는다. 그리고 유자·밤·대추·잣·호두 등 견과류로 만든 소를 올리고 그 위에 찹쌀가루·거피팥고물을 올리는 작업을 반복한 다음 찌는 떡이다. 봉우리처럼 볼록하고 두꺼운 모양에 쫄깃한 식감, 고소하고 달콤한 맛이 일품이다.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에 등장한 이후부터 1902년까지 궁중의 모든 연회상에 놓였던 떡이 바로 두텁떡이에요. 여러 단계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만들기는 쉽지 않지만, 호불호 없이 누구나 맛있게 먹을 수 있어요. 모양은 화려하지 않지만 수수한 품격이 있는 떡이죠.”
전통을 기반으로 한국의 맛과 멋을 알리다
한국의 궁중음식이 본격적으로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부터이다. 1971년 5월 개원한 궁중음식연구원의 초대 조교로 근무한 정길자 원장은 1981년 ‘한국의 집’ 개관 후 입사 4년 만에 조리실장이 되었다. 1986년 아시안게임에 이어 1988년 서울올림픽까지 연이어 개최된 굵직한 행사에서 조선의 다양한 궁중음식을 선보이며 한식의 위상을 높였다. 이후에도 한식 메뉴와 코스 개발은 물론이고 장류와 김치를 비롯해 육포와 병과, 두부 등을 직접 만들면서 궁중음식의 명성을 높여 갔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병과는 궁중음식 행사에서 부수적인 역할을 했지만, 요즘에는 조선 병과의 독특한 식감, 오방색의 화려함과 정갈함이 해외에 알려지며 주목을 받고 있어요. 외국인들은 색깔이 화려한 무지개떡이나 각색편, 달콤한 맛이 강한 약과, 정과 등을 선호해요. 우리나라 고유의 병과를 알리는 데는 빚어내는 시간과 정성, 그 속에 깃든 역사와 문화까지 전달되어야 하므로, ‘가치’의 보전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음식은 무형의 것이기에 시대에 따라 새로운 모습으로 변할 수밖에 없어요. 전통의 기반 위에서라면, 요즘 사람들의 입맛과 문화에 따라 세련되고 아름답게 변화하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2000년대 이후에는 해외에서도 우리나라 떡과 과자의 인기가 높다. 전통 한과는 2000년 아셈 서울회의 때 각국 정상 만찬 디저트로 제공돼 ‘곡물로 만든 천상의 식품’이라는 찬사와 함께 “일본의 화과자보다 화려하고 달콤하며 매력적이다”라는 평가를 얻기도 했다.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전인 지난해까지도 정길자 원장은 프랑스, 러시아, 중국 등 세계 곳곳을 누비며 우리나라 궁중음식과 병과의 아름다움을 알렸다. 앞으로도 제자들을 길러내며 우리 고유의 맛과 멋을 알리고 싶다는 그녀의 열정이 조선왕조궁중음식의 계보를 잇는 디딤돌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DITOR AE안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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