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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대첩이 일어난 바다에서 찾은 해전의 흔적
'불멸의 기록을 현실로 보다'

이순신 장군은 세계 해전사에서 손꼽히는 명장 중 한 명으로 그가 만든 불멸의 기록은 신화로 남아 있다. 크고 작은 해전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고, 특히 13척의 배를 가지고 130여 척의 왜선을 상대한 명량대첩은 그의 능력을 보여 주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명량대첩로 해역을 바라보는 이순신 장군상

역사적 해전의 흔적을 간직한 진도 명량대첩로 해역
1597년 9월 벽파진(碧波津)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 수군은 왜군이 울돌목(명량)을 향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전라우수영으로 이동했다. 그 다음날 왜군이 배 130여 척을 이끌고 울돌목으로 이동하자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의 배 13척 역시 적진으로 향했다. 왜군이 끌고 온 많은 배를 보고 겁을 먹은 각 배의 수장들은 전투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으나 이순신 장군은 그런 그들을 꾸짖으며 울돌목의 조류 흐름이 바뀌기를 기다렸다. 자신만만하게 공격하던 왜군은 조류의 흐름이 불리하게 바뀌자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결국 사기가 꺾인 채 후퇴했다. 그렇게 이순신 장군은 13척의 배를 이용해 왜선 130여 척과 맞서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둔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2012년부터 수행한 진도 명량대첩로 해역(이하 명량대첩로 해역) 수중발굴조사에서도 이같은 해전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조사 해역은 예로부터 조류가 거세어 선박을 운항하기 힘들기로 유명한 4대 험조처(險阻處)* 중 하나인 울돌목에서 남동쪽으로 약 4km, 벽파 진에서 북쪽으로 약 500m 떨어진 곳으로 명량대첩이 벌어졌던 곳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다.
* 4대 험조처는 진도 울돌목, 태안 난행량, 강화도 손돌목, 장산곶 인당수다.
명량대첩로 해역 수중 유적은 도굴범의 검거로 존재가 알려졌다. 2011년 문화재청은 서울경찰청과의 합동수사로 문화재 도굴범을 검거했다. 이때 압수된 유물이 명량대첩로 해역에서 도굴한 청자베개 등 9점이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이듬해 서울경찰청의 협조로 유적의 위치 정보를 받아 탐사를 실시했다. 그 후 6차례의 수중발굴조사를 통해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대부분 청자와 도기다. 울돌목은 남해와 서해를 잇는 길목이며, 강한 조류의 영향으로 해상사고가 잦았던 곳이다. 때문에 뱃길을 이용해 운반했던 고급 청자나뱃사람들의 생활용품이 발견된 유물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左) 소소승자총통은 발굴조사 이전까지 실물은 물론이고 문헌에서도 기록을 찾을 수 없어 그 존재를 알지 못했다. (右) 1점의 소소승자 총통에 남아 있는 명문

임진왜란과 관련된 유물 다수 발견
이 중 임진왜란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흥미로운 유물도 발견되었다. 소소승자총통(小小勝字銃筒) 3점, 석환(石丸) 6점, 노기(弩機) 2점 등이다. 소소승자총통은 조선시대에 사용한 개인용 화기로 발굴조사 이전까지 실물은 물론이고 문헌에서도 기록을 찾을 수 없어 그 존재를 알지 못했다. 소소승자 총통이 발견되기 전까지 알려진 조선시대 소형화기로는 세총통(細銃筒)과 승자총통(勝字銃筒), 승자총통을 개량한 별승자총통(別勝字銃筒), 차승자총통(次勝字銃筒), 소승자총통(小勝字銃筒) 등이 있다. 소소승자총통은 문헌기록 없이 실제 유물로만 확인된 유일한 총통이다.
소소승자총통 3점은 각기 미세하게 차이는 있지만, 길이는 약 58cm에 총구 지름은 2.8cm 정도다. 총통 자루에는 각각 명문이 남아 있는데 그중 하나를 살펴보면 ‘만력무자 / 삼월일좌영 / 조소 승자 / 중삼근오량 / 장윤덕영(萬曆戊子 / 三月日左營 / 造小勝字 / 重三斤五兩 / 匠尹德永)’이라고 새겨져 있다. ‘小’자와 ‘勝’자 사이에는 ‘〈’가 적혀 있는데 이는 같은 글자를 반복한다는 의미의 부호다.
이를 통해 이 총통이 1588년(선조 21) 3월 전라좌수영에서 장인 윤덕영이 만든 무게 3근5량의 소소승자총통임을 알 수 있다. 다른 2점의 총통 역시 만든 시기가 4월과 5월로 조금 차이를 보일 뿐 명문에는 큰 차이가 없다. 또한 소소승자총통 내부에는 흙, 종이, 화약으로 추정되는 물질이 남아 있었다. 흙과 종이, 화약은 총통을 장전하는데 사용하는 재료로 총통이 사용 도중 바다로 빠졌음을 암시한다.
01. 돌을 구형으로 다듬은 석환은 지름이 8~10cm 정도다. 02. 조선시대 사용했던 개인용 쇠뇌인 궐장노. 화살표가 가리키는 부분이 노기다. 03. 쇠뇌의 방아쇠 부분인 노기

벽파진해전과 명량대첩의 전쟁 유물
임진왜란 시기 해전에서 사용한 화포의 포탄으로 보이는 석환도 6점 발견되었다. 석환은 조선시대 화포에 사용하는 철환(鐵丸)·화살 등이 부족할 때나 병사들이 훈련할 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환은 돌을 구형(球形)으로 다듬어 만들었으며, 지름은 보통 8~10cm 정도다. 조선시대에 사용된 화포로는 천자총통(天字銃筒), 지자총통(地字銃筒), 현자총통(玄字銃筒), 황자총통(黃字銃筒) 등이 있는데 그중 천자총통이 가장 크고 다음으로 지자·현 자·황 자총통 순이다.
석환은 그 크기로 보아 지자총통에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현존하는 지자총통의 크기는 전장 88.7~89.5cm, 내경 9.3~10.5cm이다. 석환과 총통은 인근 해역이 과거에 해전지였거나, 군선 등 전쟁 유물이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된다.
노기 2점도 확인되었다. 노기는 쇠뇌**의 방아쇠 부분을 가리킨다. 쇠뇌는 사용 시기를 추정하기 어렵지만 이 일대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사용했던 궐장노라는 개인용 쇠뇌에 장착해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 쇠뇌는 시위를 걸고 방아쇠를 당겨 화살을 추진시키는 무기로 서양의 석궁과 유사하다.
이러한 전쟁 유물이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해전은 벽파진해전(1597년 9월 7일)과 명량대첩(1597년 9월 16일)이다. 벽파진해전은 수중 유적이 위치한 벽파진 일대에서 벌어진 해전이고, 명량대첩은 벽파진해전 9일 후 울돌목에서 벌어진 해전이다. 이들 해전에서 사용됐던 무기가 이곳에 흘러들어 왔을 가능성이 높다.
명량대첩로 해역 수중 유적은 여러 시대의 유물이 서로 뒤엉켜 발견된다는 특징이 있다. 이런 현상은 울돌목의 강한 조류의 영향으로 발생하는 와류(渦流) 현상이 원인으로 보인다. 와류 현상과 10~20cm에 불과한 수중 시야는 발굴조사에 많은 어려움을 주고 있다. 이런 어려움에도 명량대첩로 해역에서 발굴된 유물이 지닌 의미와 중요성 때문에 명량대첩로 해역 수중발굴조사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장기적인 계획 아래 연차적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앞으로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해전의 증거를 보여 주는 다양한 유물과 고선박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EDITOR AE안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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