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DMZ가 숨겨둔 보물
기다림의 길목에 있는 옛 성터
'호로고루(瓠蘆古壘)'

연천 호로고루는 임진강이 지류와 만나 형성 된 삼각형의 대지 위에 조성된 독특한 고구려 성으로, 임진강이 국경하천 역할을 했던 삼국시대부터 강을 도하하려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중요시되었던 곳이다.
임진강 절벽 위의 고구려성
호로고루는 사적 제467호로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에 위치하며, 1991년 문화재연구소가 실시한 군사보호구역 내의 문화유적 지표조사를 통하여 고구려 유적임이 알려지게 되었다. 호로고루에 대한 학술조사는 토지주택박물관에서 1998년 지표조사를 실시한 이후 4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성벽의 전체 둘레는 약 401m이고, 그중 남벽은 161.9m, 북벽은 146m, 동벽은 93.1m에 이른다. 성의 형태는 북동쪽에서 남서 방향으로 흐르는 임진강에 접한 현무암 천연 절벽의 수직 단애 위에 삼각형 모양을 하고있다. 이와 같이 강벽의 단애를 이용한 성지는 임진강 변에서만 발견되는 특이한 형태로 근방의 당포성과 은대리성과도 흡사한데, 이러한 형태의 성들을 강안 평지성(江岸平地城)이라 한다.
(左),(右) 연천 호로고루는 임진강이 지류와 만나 형성된 삼각형의 대지 위에 조성된 독특한 고구려성이다.

유일하게 강을 끼고 있지 않고 ‘한들벌’로 이어지는 동쪽변에는 남북 방향으로 길게 쌓은 인공적인 성벽이 있다.
높이 10.2m, 너비 29m, 길이 84m 정도의 낮지 않은 높이와 규모로 인해 마을 주민들은 호로고루를 ‘재미산(財尾山)’ 또는 ‘재미성(財尾城)’으로 부르고 있다. 이 동벽은 토성과 석성의 축성기법을 결합한 독특한 고구려의 축성기법인 것으로 밝혀졌다. 성벽의 중심부는 판축으로 조성하고, 성벽의 바깥쪽과 안쪽은 석축으로 마감하였다. 또한 석축성벽을 쌓기 위한 나무기둥을 고정시키기 위한 확돌과 기둥홈들이 발견되었으며, 남쪽과 북쪽에 두 개의 치(雉)가 확인되었다. 이는 고구려의 도성이었던 국내성의 축성기법과 같은 유형의 축성법이라고 한다. 또한, 3차 조사에서 동벽이 구축되기 전에 2열의 목책이 먼저 구축되어 있었음이 밝혀졌다.
발굴된 유적으로는 우물과 수혈유구, 목책, 집수시설로 알려진 지하식 벽체건물지 및 고려시대 건물지 등이 있다. 지하식 벽체건물지는 동서 길이 786cm, 남북 길이 720cm, 깊이 264cm에 달하는 사방을 돌로 쌓은 석축유구로 집수시설의 용도로 조성했지만 이후 이를 매립하고 온돌건물을 구축한 복합유구로 밝혀졌다. 유물로는 고구려시대 북으로 추정되는 상고(相敲)라는 명문이 새겨진 회색 토기가 깨진 상태로 출토되었다. 또한 연화문와당 5점과 와당이 부착되었던 흔적이 있는 와편 10여 점과 치미(相敲)가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 호로고루에는 치미와 화려한 연화문 와당이 있는 기와건물이 있었으며, 높은 신분의 지휘관이 상주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삼국 통일의 완수를 위한 격전의 전장
호로고루는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또 다른 성지인 장좌리고루와 함께 이잔미성(二殘眉城)이라 불리기도 한다. 장좌리고루는 군부대의 진지로 활용되면서 석축이 무너지고 돌무더기만이 남아 그 원형을 확인하기 어렵다. 강을 두고 마주 보는 두 성은 전술적으로 상호 협조하는 형태이거나 역으로 대적하는 기능을 수행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 강을 끼고 마주 보는 두 성이 세워진 것은 임진강에서 이곳이 갖는 지형적 중요성 때문이다. 호로고루는 배를 타지 않고 임진강을 도강할 수 있는 최초의 여울목인 호로탄(瓠蘆灘)이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육로를 통해 개성 지역에서 서울 지역으로 가는 최단거리에 놓여 있으며, 장마철을 제외하면 물의 깊이가 무릎 정도 밖에 되지 않아 말을 타거나 걸어서 건널 수 있으므로 이 여울목을 통제할 수 있는 호로고루의 전략적 중요성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호로탄은 호로하, 표로탄(瓢蘆灘), 표로하 등으로 불리었으며 ‘표주박형태를 가진 하천’이라는 뜻으로, 임진강이 구불구불하여 사행(蛇行)하며 흐르는 모습에서 생겨난 명칭으로 보인다. 호로고루라는 명칭은 이 성이 호로탄 위에 축조되었기 때문이다.
호로고루 성지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 후기 이후에 주로 나타나는데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경기읍지(京畿邑誌)』 장단현 고적조에는 “세상에서 전하기를 삼국시대의 고루이며 당의 유인궤(劉仁軌)가 병사들을 이끌고 호로하를 끊어 신라의 칠중성(七重城)을 공격한 것이 바로 이 성이다”라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673년에 고구려 부흥을 꾀하던 유민들을 당나라 연산도 총관대장군 이근행(李謹行)이 호로하에서 쳐부수고 수천 명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싸움에서패한 고구려 유민들은 이후 신라로 달아났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한 같은 해 신라본기에서 “당의 군사가 말갈·거란 군사와 함께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왔는데, 무릇 아홉 번 싸워 우리 군사가 이겨 2000여 명을 목 베었고 당의 군사 중 호로(瓠瀘)와 왕봉(王逢) 두강에 빠져 죽은 자는 이루 셀 수 없었다”는 기록에서 당군과 신라군이 호로하 즉 호로탄에서 격렬한 싸움을 벌였으며 신라군이 승전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가 멸망하기 이전에도 호로고루에서 전투가 있었음이 기록으로 전해진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2년 2월초에 고구려 공격을 위해 평양에 있던 당나라의 소정방군에게 식량을 전달하고 귀국하던 김유신은 과천( 川)을 넘어 신라로 돌아왔는데 도중에 뒤쫓던 고구려군과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같은 내용이 「김유신전」에는 ‘표하(瓢河)’로, 문무왕의 「답설인귀서(答薛仁貴書)」에는 ‘호로하(瓠瀘河)’로 되어 있어 ‘과천’은 모두 호로고루 앞의 호로탄 하천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6세기 중엽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이후 고구려 멸망까지 120여 년 동안 임진강은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 하천이었다. 개성에서 서울로 가는 길에 거쳐야 하는 임진강에서 배를 이용하지 않고 도강이 편리한 여울목 지점은 방어의 요충지이자 공격의 루트가 된다. 삼국시대 변경지대로서 남진이나 북진의 거점으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며, 통일전쟁의 마무리를 위한 신라와 당나라 간의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호로탄을 거쳐 개경으로 가는 장단도로가 주요 교통로였으며, 한국전쟁 당시에도 북한군의 주력 전차부대가 개성에서 서울로 진격하기 위해 도하한 지점이었다.
1945년 국토가 분단되기 이전에는 임진강은 수도 서울을 관통해 흐르는 한강과 연결된 수로로서 번성하였다고 한다. 특히 호로고루 부근의 고랑포까지 대형 선박들이 운행되면서 임진강 수운의 거점을 이루었다고 한다. 고랑포구는 1930년대 개성과 한성의 물자교류를 통하여 화신백화점의 분점이 자리 잡을 정도로 번성하였으나 한국전쟁과 남북분단으로 쇠락하고, 지금은 군사분계선이 부근을 지나고 있어 강에는 배를 띄울 수 없으며, 남북 간의 대립이 심하던 시기에는 민간인 통제구역에 해당하는 얼어붙은 지역이었다. 남북 간의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는 이곳에 대한 규제도 많이 완화되어 경직된 군사도시에서 관광도시로서의 모습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또 다른 통일을 꿈꾸며
호로고루는 고구려 멸망 후 신라가 사용하면서 오랜 전쟁으로 보수가 필요한 성벽을 허물지 않고 그대로 둔 상태에서 성벽을 덧붙여 쌓는 방식으로 보수하였다. 이로 인해 고구려성벽은 신라성벽에 가려져 그 모습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인민군의 포대가 설치되면서 성벽의 윗부분과 남쪽 부분이 크게 훼손되었고, 이후 마을 주민들이 뱀을 잡기 위해 중장비로 남쪽 치의 상부를 무너뜨리기도 하고, 버섯 재배지로 이용하기 위해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 부분의 성벽을 일부 허물기도 하는 등 훼손이 심한 상태였다.
호로고루는 2007년에 종합정비계획이 수립되어 현재는 잘 정비된 상태로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도로를 정비하고 주차장과 화장실을 설치하여 관광객들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연천 호로고루 홍보관을 개관해 호로고루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동벽의 일부 성벽 단면을 노출시켜 고구려와 신라의 성벽과치 등의 구조와 형태를 살펴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유적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있다. 성 내부 역시 잡목을 제거하는 등의 정비와 더불어 곳곳에 안내판을 설치하여 관람에 도움을 주고 있다. 성 안쪽의 절벽가에는 임진강을 굽어볼 수 있는 전망대와 망향단을 설치하여 통일 안보 유적지로서의 면모도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 드넓은 성 내부에 해바라기 밭을 조성하였다. 2014년부터 연천군에서는 ‘연천 장남 통일바라기’ 축제를 이곳에서 개최하고 있다. 올해에도 8월 30일부터 9월 1일까지 ‘2019 통일바라기, 평화를 노래하다’라는 테마로 개최하였다고 한다. 해바라기 밭은 주민들과 군관민이 협력해 조성하였다고 하며 이 축제도 그러한 의미에서 뜻깊은 행사라 할 수 있다. 해바라기의 꽃말은 ‘기다림’이라고 한다. 통일로 가는 길의 험로를 넘어 평화와 화해, 번영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은 해바라기 밭은 이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목마른 기다림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EDITOR AE안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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