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재사랑
간결함 속의 심오함
영화 <타짜>속 군산의 시간
'히로쓰 가옥, 빈해원, 조선은행'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얼굴에 서린 눈빛과 표정만으로 많은 이야기를 건네는 배우가 있다. 만약 군산이 사람이었다면 그런 진한느낌의 배우가 아니었을까? 그 어떠한 겉치레없이 그 자체만으로도 드라마가 펼쳐질 것 같은 공간. 군산은 개항과 일제강점기의 시간이 쌓여 고유의 무늬를 만든다. 어디에 카메라를 들이대도 ‘영화’가 되는 곳이다. 매일을 빈곤과 싸워야 했던 조선인들 위에 군림하던 일본인이 남기고 간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도 그렇다. 이상하리만치 고요하게 남아 있는 그 흔적이 군산만의 묘한 ‘바이브’를 만들어낸다.
투기에 목숨 건 사람들을 그린 소설 그리고 영화
일찍이 채만식은 소설 『탁류』를 통해 군산을 배경으로 ‘미두(米豆)’라는 투기 노름 속 인간 군상을 그린 바 있다.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최동훈 감독의 2006년 영화 <타짜>역시 군산을 배경으로 화투에 인생을 건 이들의 모습을 포착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군산은 때로 시대 배경을 알아차리기 어려울 만큼 역사와 전통이 혼재되어 있다. 인간의 뒤틀린 욕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화 <타짜>의 주된 배경으로 군산이 등장하는 이유 또한 같은 맥락일 거다. 영화에는 군산의 지나간 시간을 품고 있는 공간들에 집중한다. 그 자체로 멋스러워 <장군의 아들> <아가씨> 등 한국 영화가 사랑하는 신흥동 일본식 가옥은 극 중 평경장(백윤식 분)의 자택으로 주인공 고니(조승우)가 화투를 배우는 중요한 장면의 배경이 된다. 근대기 화교 문화를 보여주는 오래된 중식당 빈해원 그리고 한국과 대륙의 경제 수탈을 목적으로 일제가 세운 조선은행까지. 거리마다 한 편의 영화가 펼쳐지는 군산의 매력을 들여다보자.
01.영화 <타짜>에서 평경장의 집으로 나온 등록문화재 제183호 군산 신흥동 일본식 가옥 02.영화 타짜 포스터
03. 등록문화재 제183호 군산 신흥동 일본식 가옥의 측면 진입부.
일제강점기에 군산에서 포목점과 소규모 농장을 운영하며 군산부협의회 의원을 지낸 일본인이 건립한 일본식 2층 목조 가옥이다.
04. 등록문화재 제183호 군산 신흥동 일본식 가옥의 정면

한국 영화가 사랑하는, 신흥동 일본식 가옥
영화 <타짜>에서 고니는 최고의 타짜임을 자처하는 평경장에게 이렇게 말을 건넨다. “아니 그렇게 잘나신 분이 왜 이런 데 사세요?” 극 중에서는 아주 오래된 가옥 취급을 받았지만, 군산의 근대 건축물 중 가장 대중에게 사랑받고 있는 이 신흥동 일본식 가옥은 등록문화재 제183호로 지정됐다. 일제강점기에 군산부 협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포목점을 운영했던 ‘히로쓰 게이사브로’ 가 살았던 곳으로 ‘히로쓰 가옥’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목재로 지은 2층 기와집으로 대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일본식 정원이 인상적이다. 1층은 온돌, 2층은 다다미방으로 만들었다. 근세 일본 무가(武家)의 고급주택 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2층짜리 본채 옆에 단층 객실이 ‘ㄱ’자 모양으로 비스듬히 붙어 있는 형태다. 2층의 다다미방 2칸 역시 일본식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다. 당시의 일본 상류층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히로쓰 가옥 밖의 조선인들이 얼마나 상반되는 빈곤한 삶을 살았는지를 떠올려본다면, 이곳이 기억되어야 할 아픈 역사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거다. 어쨌든 따로 손 댈 곳 없이 완벽한 영화 세트장인 탓에 유독 한국 영화가 사랑하는 로케이션이기도 하다.
이미 1990년대에 임권택 감독의 영화 <장군의 아들>을 통해 유명세를 탔다. 군산시 금동·동신아파트와 군산여자고등학교 사이 골목에 위치한다. 요즘엔 이 골목 곳곳에도 비슷한 분위기의 카페 등이 들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그 시절의 분위기를 느끼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의 발걸음 끊이질 않는다. 평경장의 자택으로 등장하는 히로쓰 가옥은 고니가 평경장에게 타짜 훈련을 받는 중요한 장면에 쓰인다. “화투와 몰아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명대사의 배경이 바로 히로쓰 가옥. 이렇게 인기 영화 속에 주요 배경으로 등장한 탓에 관람객이 몰려 훼손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래서 군산시에서는 문화재 보호를 위해, 2015년 3월부터 일반인의 실내 관람을 제한하고 있다. 현재는 히로쓰 가옥의 정원과 건축물의 외부 관람만 가능하다고. 그럼에도 이곳만의 분위기를 엿보고 싶은 젊은이들이 카메라를 들고 끊임없이 찾아온다.
01.등록문화재 제723호 군산 빈해원. 1950년대 초부터 화교인 왕근석씨에 의해 창업되어 대를이어온 중국 음식점으로서 1∼2층이 개방된 내부 공간이 특징적이다.
02~03. 인간의 뒤틀린 욕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화 <타짜>의 한 장면
04. 조선총독부의 핵심 금융기관인 구)조선은행 군산지점(등록문화재 제374호)

가장 오래된 중식당, 빈해원
물짜장으로 유명한 빈해원은 군산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 음식점이다. 화교 왕근석 씨가 한때 군산의 중심지였던 장미동에서 1950년대에 첫선을 보인 ‘청요릿집’이었다. 그러다 1965년 현재 건물로 옮겨왔고 1970년대에 증축했다. 철근 콘크리트와 벽돌로 쌓은 2층 건물로 뻥 뚫린 시원한 내부 구조가 특징이다. 요즘의 건축물에선 쉽게 볼 수 없는 특유의 개방감 때문에 짜장면보다 카메라를 먼저 꺼내게 되는 곳이다. 근대기 화교 문화를 보여주는 건축물이자 당시 군산의 생활사를 담고 있다는 문화재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아 2018년 8월 등록문화재 제723호로 지정됐다. 현재까지도 왕성하게 영업 중인 식당이 문화재로 등록되는 것은 일제강점기 때 건립된 전북 고창 조양식당을 제외하고는 흔치 않은 사례라고. 빈해원은 <타짜>에서 고광렬(유해진 분)이 고니의 가족을 만나 도박으로 번 돈을 건네주는 대목에 등장한다. 고니의 삼촌이 돈 가방을 보고 반가워 고광렬의 바지에 물짜장을 엎지르는 바로 그 장면이다.
‘2층 청요릿집’으로 이름을 떨친 빈해원은 한창 시절, 600명이 한 번에 밥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스케일을 자랑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빈해원 외에도 군산엔 유명한 짬뽕집이 꽤 많다. 왜 하필 짬뽕일까? 이는 군산의 근대 역사를 함께했던 화교들 덕분이다. 1890년대 후반 이곳엔 산동 출신 화교들이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해 한때는 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이들은 주로 비단을 팔고 농사를 짓거나 식당을 운영했다. 꾸준히 유입된 덕에 1941년엔 화교 학교도 세워졌다. 화교소 학교장이었던 여건방 씨가 운영하던 용문각을 시에 무상으로 기증해 군산 화교 역사관으로 운영 중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알고 빈해원의 물짜장을 먹는다면 더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군산의 흥망성쇠, 조선은행
군산은 항구도시답게 내항을 자주 볼 수 있다. 군산시 중앙로 구 경찰서 로터리에서 내항으로 가는 언덕길에 구 조선은행 건물이 위치한다. 군산의 흥망성쇠가 고스란히 새겨진 곳이다. 일제강점기 군산항은 미곡 수탈의 통로였다. 현물 없이 쌀 거래로 시세 차익 을 남기는 일종의 투기 행위인 미두(米豆)장이 서면서 돈을 좇는 모두가 군산을 찾았다. 누군가는 부자가 됐고 누군가는 전 재산을 잃었다. 누구의 인생이 어떻게 되던간에 쌀은 전부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흘러들어갔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濁流)』엔 당시의 상황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조그마한 어촌 마을이던 군산에 2, 3층 신식 건물에 은행과 요정 청요릿집이 들어서고 지게꾼, 인력거꾼 날품팔이가 거리를 가득 메운 꽤 그럴듯한 도시가 됐다’고 말이다. 돈 냄새를 맡고 모여든 일본인들이 군산에 자리를 잡았다. 앞서 본 히로쓰 가옥의 히로쓰도 당시 군산의 부호로 명성이 일본 땅에까지 자자했다고 한다. 이들이 돈을 맡기고 어음을 발행했던 곳이 바로 조선총독부의 핵심 금융기관인 조선은행 군산지점이었다.
어찌나 힘을 주어 지었는지 조선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멋진 건물로 유명했다고. 조선인의 피, 땀, 눈물로 지은 조선은행은 해방 이후 나이트클럽, 노래방, 술집 등으로 엉뚱하게 쓰였다. 다행히 군산지역 근대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자료로 관심을 받게 되면서 2008년 7월에 등록문화재 제374호로 등록됐다. 지금은 근대건축관으로 당시의 건축 양식을 생생하게 탐구할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절대 잊어서는 안 될 대한민국의 근대 역사를 품고 있는 군산의 시간은, 그래서 더 천천히 흘러간다.

EDITOR AE류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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