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근대와의 조우
근대로 다리 놓은 부산, 그 부산스러움 속으로
'부산 영도대교 언저리 원도심'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 "부산은 동래군의 동평현에 있는데 산이 가마솥 모양으로 생겼기 때문에 그 밑을 부산포라고 한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가마솥 부(釜)에 뫼 산(山) 자를 쓰는 부산, 이름이 지니고 있는 뜻처럼 부산은 참 넉넉하고도 뜨거운 땅이다. 그 품과 곁이 어렵디 어려웠던 시절에도 많은 이들을 '살게 했던 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 어느 때보다 가마솥 같았던 부산의 근대를 마주한다.

영도대교



기약 없지만 돌아설 수 없었던 사람들의 흔적
1934년 11월 23일 부산항 일대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부산 사람들뿐만 아니라 멀리서 부러 찾아왔다는 사람들이 저마다 고개를 빼고 말을 섞었다. 세상에, 육지와 섬을 잇는 다리가 놓인단다. 바다 위로 다리를 놓는 것도 놀라운데 큰 배가 드나들 수 있도록 다리가 하늘 위로 열린다고 했다. 듣도 보도 못한 신기한 구경을 놓칠세라 수만 명의 인파가 몰렸다.
우리나라 최초의 연륙교이자 동양 최초의 도개교로 모습을 드러낸 영도대교(부산광역시 기념물, 사진 01) 개통식 풍경이다. 개항과 함께 맞게 된 우리나라 근대기의 모습은 두 얼굴이다. 식민지 정책에 따라 의도된 근대화, 그 가운데 꽃핀 근대성. 영도대교 개통은 그 빛과 그림자가 포개지는 지점이기도 할 것이다.
부산 제일의 구경거리였던 영도대교는 광복 후 다른 이유로 북적였다. 전쟁을 겪으며 뿔뿔이 헤어지게 된 이들이 그네들이 닿을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남쪽 땅 부산, 그곳에서 가장 상징적인 장소인 영도다리에서 다시 만나기로 기약했던 것. 밀리고 밀려온 사람들은 영도대교 주위를 서성이며 일렁이는 파도 위로 피붙이의 얼굴을 더듬었다.

02. 점바치 골목 03. 소화장



1966년 노후화로 도개가 중지되었고, 1980년 바로 곁에 부산대교가 건설되면서 철거 위기를 맞았던 영도대교는 우리 근현대사의 상징적인 건축물로 인정 받아 수년간의 복원 과정을 거쳐 2013년 11월 27일 다시 한번 개통식을 개최했다.
영도대교가 다시 도개를 시작하면서 주변 가치는 상승했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영도대교 아래에 한창 때는 50여 곳의 점집이 줄을 이으며 ‘점바치 골목(사진 02)’이 형성됐다. 왜 점집이 성행했겠나. 꼭 믿어서 드나들었을까. 답답한 마음 토해내고 달래는 일이었을 것이다. 부산 영도의 독특한 생활문화를 보여주었던 점바치 골목이 수년 전 경제논리를 이기지 못하고 사라지게 된 것이 못내 아쉽게 다가온다.

04.청풍장 05.국제시장 06.보수동 책방골목



밀려왔지만 쓰러지지 않았던 사람들의 삶자리
영도대교에서 국제시장 방향으로 향하던 길에 묘한 분위기의 건축물을 마주한다. BIFF 광장의 좁은 골목길에 위치한 소화장(사진 03)과 청풍장(사진 04)은 한순간 ‘내가 타임 슬립을 한 것인가’ 엉뚱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언제 철거해도 이상할 것 없어 보일 만큼 노후되었지만 이들 건물이 건립된 1940년대 초반에는 부산에서 내로라하던 사람들이 입주했던 부산 최초의 공동주택이다.
한국전쟁 때는 정부 주요 인사들이 숙소로 이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근대기 주거 문화의 변화상을 살펴볼 수 있는 상징적인 장소인데 건물에 붙은 ‘재난위험시설 지정 안내 표지판’이 머지않은 이별을 짐작케 한다. 더불어 앞서 점바치 골목과 마찬가지로 어떤 역사적 상징도 유한할 수는 없겠지만 유의미한 역사적 장소들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만드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초량 왜관과 가까워 일제강점기 일본인 구역으로 변모했던 부산 원도심에는 해방 후 크고 작은 시장들이 자리를 잡게 된다. 일본인이 남긴 물자와 바다 건너에서 들여온 물건들이 한데 거래될 수 있었던 입지였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형성된 곳이 국제시장(사진 05)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로는 미군 구호물자와 밀수품까지 밀려들었고, 이렇다 할 밑천 없이 부산에 닿게 된 피란민이 국제시장 주변에 노점을 형성하며 시장은 더욱 문전성시를 이루게 됐다.
2000년대에 접어들어 유통 구조와 소비 패턴의 변화로 쇠퇴하는가 싶었던 국제시장은 이곳에 뿌리내린 주인공을 중심으로 6.25전쟁, 피란, 이산가족, 파독, 베트남전쟁 등 우리 근현대사의 굵직한 이야기들을 재현한 영화 <국제시장>을 계기로 다시금 주목받게 됐다. 골목골목 다루는 품목이 달라 꼭 필요한 것이 없어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기도 하지만 이 많은 가게들 하나하나에 영화 속 주인공과 같은 삶이 펼쳐졌을 거란 생각에 구석구석 애정 어린 시선으로 둘러보게 된다.
주로 항구나 시장에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피란민은 국제시장 너머의 구덕산 자락 언덕배기에 거처를 마련했다. 난리통에 부산으로 임시 이전한 학교들이 이곳에서 노천교실, 천막교실을 열어 수업을 이어갔다. 자연스레 그 언저리에 헌책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수동 책방골목(사진 06)의 시작점이다. 어렵던 시절 헌책을 내다 판 사람들에게 책은 밥이 되었고, 책을 손에 넣은 사람에게 책은 꿈이 되었다. 골목 풍경이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헌책방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정취가 담뿍하다. 누가 어떤 사연으로 이 책을 내놓았을까 상상하며 책장을 넘기다 보면 귀하지 않은 책이 없다고 느껴진다.

07. 부산근현대역사관 08. 부산지방기상청



역사적 현장에서 역사를 되짚어
개항을 기점으로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근대도시로 거듭난 부산은 6.25전쟁 동안 대한민국 임시수도로 기능했고, 이후 산업 부흥의 기지 역할을 하며 대한민국 제2의 도시이자 제1의 무역항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부산의 근현대사를 부산이라는 테두리 안에 가둘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제시장과 면한 용두산 자락에 부산 근현대사를 집중 조명한 부산근현대역사관(사진 07)에서 그 면면을 확인할 수 있다. 부산이 가장 힘차게 경제성장에 힘을 보탰던 1960년대에 건립된 구 한국은행 부산본부(부산광역시 문화유산자료) 건물과 일제강점기 수탈의 첨병 역할을 했던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부산광역시 기념물) 건물을 전시관으로 단장해 역사적 현장에서 역사를 되짚게 된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짙다.
이번 여정은 부산근현대역사관 길 건너 오르막 끝에 위치한 부산지방기상청(부산광역시 기념물, 사진 08)에서 마무리한다. 1904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기상관측이 시작된 곳으로 2017년 세계기상기구(WMO)에서 ‘100년 관측소’로 선정했다. 100년 관측소는 기상 분야의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라 일컬어지는데, 2022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등재된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에 포함되면서 다시 한번 그 가치를 확인케 됐다.
배를 형상화한 듯한 구조와 관측소라는 성격 자체도 인상적이지만 무엇보다 이곳 앞마당에서 관측소를 등지면 용두산공원과 눈높이를 맞추며 그 아래로 펼쳐지는 부산의 원도심과 부산항까지 한눈에 담을 수 있다는 점이 이곳의 매력을 배가한다. 지난 100여 년 가마솥 같았던 부산을 모두 지켜보았겠구나 싶은 생각이 가시지 않는 것. 저 멀리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차분히 숨을 고르며 다시금 부산의 시간을 음미해 보게 된다.

EDITOR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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