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무형유산의 맛·멋·흥
음력 섣달그믐 악귀를 몰아내고 새해 평온을 기원하다 처용무
'국가무형문화재이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인 처용무'

처용무는 궁중의 춤, 즉 정재(呈才) 가운데 역사가 긴 작품 중 하나이다. 처용의 연원은 신라의 헌강왕(憲康王, ?~886) 시기의 설화로부터 시작한다.

현행 처용무 사진, 사단법인 처용무 보존회 제공



그 내용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자세히 전한다. 태평성대를 이루고 있던 시기에 헌강왕이 물가에 나가 놀고 있는데 갑자기 몰려온 짙은 안개와 구름 때문에 길을 잃게 되었다. 헌강왕이 천문과 점성술을 담당하는 일관(日官)에게 날씨가 급변한 이유를 물었다. 일관은 동해 용왕이 내린 나쁜 조화(變)이오니 좋은 일을 행해야만 안개를 물릴 수 있다고 고한다. 헌강왕은 용을 위해 그 근처에 절을 지으라고 명한다. 절이 세워지자 구름이 개고 안개가 흩어져 절의 이름을 개운포(開雲浦)라고 하였다. 이에 동해 용왕이 감동하여 일곱 아들과 함께 왕 앞에 나타났다. 그들은 왕의 덕을 찬양하고 춤을 추며 풍악을 연주했다.
처용설화의 주인공인 처용(處容)은 바로 용왕의 일곱 아들 중 한 사람이다. 왕의 치덕을 위한 행사가 끝난 후 용왕과 그의 아들은 돌아갔지만, 처용(處容)만은 왕을 따라 수도에서 정사를 도왔다. 왕은 처용에게 급간(級干)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아름다운 여인까지 아내로 맞이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문제는 그 처가 매우 아름다웠다는 사실이었다. 역병의 신[(疫神)]까지도 처용 부인에게 연정을 느끼고 사람으로 변하여 처용이 부재한 사이 그의 집에 몰래 방문했다. 집에 돌아온 처용이 발견한 것은 그의 아내와 외간 남자가 나란히 누워 있는 모습이었다.
놀라운 것은 처용의 대처이다. 그는 분개하는 대신 돌아 나와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처용의 춤과 노래는 견디기 힘든 고통을 승화하는 아름다운 방식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역신마저도 자신을 보고 노하지 않는 처용의 모습에 무릎을 꿇었고, 그러면서 “지금부터 이후로는 공의 형용(形容)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어느 집에서나 처용의 형상을 대문 앞에 붙이는 것은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좋은 기운을 맞는다는[(進慶)]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左.『사궤장연회도첩』,<내외선도> 경기도박물관 소장,1668년 현종이 원로대신인 이경석(李景奭 1595~1671)에게 궤장을 하사하였고 이 절차를 그린 그림中.『기사경회첩』, <본소사연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영조가 51세 되는 해인 1744년 9월 기로소(耆老所)의 입사를 기념하여 제작
右.『평안감사향연도』, <부벽루연회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8세기. 대동강에서 평안감사가 베푼 잔치의 모습을 담은 그림

한해의 액운을 내쫒는 춤, 처용무
처용설화에 함의된 ‘벽사진경’이란 모든 가족이 역병이나 불행을 겪지 않길 바라고, 다 함께 상서로운 기운을 맞이하고자 하는 소망을 뜻한다. 이 설화의 내용은 후대에 꾸준히 문인의 시에 등장한다.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익제난고』 <소악부(小樂府)>에서는 처용을 ‘신라의 옛날 처용옹’이라 하며 ‘자주색 소매로 봄바람에 춤을 췄다’라고 언급했다. 이색(李穡)의 <구나행(驅儺行)>에서는 ‘신라의 처용’이 ‘칠보를 몸에 두르고 머리에 꽂은 꽃가지에서 향기로운 이슬이 떨어진다. 긴소매 낮게 휘두르며 태평을 춤추는데 취한 얼굴 더욱 붉어 술이 덜 깬 듯’이라고 적었다. 그외에도 처용설화를 바탕으로 처용의 모습을 형상화한 춤에 관한 여러 글이 문인의 기록을 통해 전하고 있다.
처용설화에 나타난 벽사진경의 의미는 신라시대에 기원한 것인데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시대까지도 계승되었다. 특히 처용무는 단지 백성들의 설화가 아니라 궁중에서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고려의 처용무는 악귀를 는 구나(驅儺) 행사의 한 종목으로 등장했고, 산대(山臺)에서 북과 징소리와 함께 공연되기도 하였다. 이후 조선 시기의 나례(儺禮) 행사, 즉 음력 12월 마지막 날에 묵은해의 잡귀를 아내는 의식에서 꾸준히 처용무가 추어졌다는 문헌의 기록이 전해진다. 또한 조선 후기에 이르러 처용무는 의식무일 뿐만 아니라 연향에서 베풀어지는 연악무로서도 그 역할이 두드러졌다. 궁중 잔치가 행해지는 동안 왕과 선비들의 흥취를 돋우는 궁중무용[(呈才)] 가운데 주요 작품으로 지속해서 등장했다.
조선 시기 처용무는 궁중 바깥에서도 공연됐고, 궁중 밖에서는 주로 나이가 많은 신하들을 위한 기로연이나 평안감사를 위한 잔치 등에서 처용무를 추는 모습이 여러 도상 자료에 나타난다. 또한 처용무는 왕이 특별한 행사에 내리는 음악인 사악(賜樂)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악으로 구분되었다. 즉, 처용무는 왕실과 신화 모두에게 한 해 동안 그들의 액운을 내쫓고 경사를 맞이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궁중 안팎에서 계속 상연되면서 현재 우리에게까지 그 내용과 의의가 전해지고 있다.

左.『악학궤범』 권9 「처용관복」, 국립국악원 소장본 右.『정재무도홀기』, 「처용정재」, 국립국악원 소장본

처용형상, 그 상서로운 기운
처용무는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처용무의 역사가 다양한 문헌에 기술되어 있고, 이로부터 처용무만의 복식과 춤사위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자료에 기초해서 작품을 복원하고 계승하려는 노력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무대에서 볼 수 있는 처용무는 과거에 비하면 그 춤사위가 빨라졌다. 이와 맞물려 공연 시간이 짧아졌다. 이런 변화는 현대인의 기호를 반영한 것일 테지만, 처용무의 전승을 이끌어 가는 이들은 처용무의 원형을 복원하기 위한 노력을 끊이지 않고 해 왔다.
처용무의 복식은 누구라도 한눈에 기억에 남을 것이다. 여타 궁중무용과 비교할 때 무척 화려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은 처용의 얼굴을 본뜬 탈이다. 처용무는 궁중무용 가운데 유일하게 가면을 쓰는 작품이기도 하다. 처용의 붉은 얼굴과 선이 굵은 이목구비는 유덕(有德)한 마음의 자세를 표현한다. 처용의 탈은 무용수의 머리를 다 가릴 만큼 큰 형태를 취하며 복숭아와 모란꽃이 장식되어 있다.
『악학궤범(樂學軌範)』에는 조선 초에 제작된 처용탈[(紗帽)]의 모습이 묘사된다. 여기서는 가면의 형태뿐만 아니라 가면을 장식하는 모란꽃, 복숭아, 복숭아 나뭇가지, 귀고리의 형상까지도 자세히 묘사한다. 현재 전승하는 처용의 탈은 대부분 이 기록에 의존하고 있다.
무용수의 몸짓은 음양오행의 원리를 따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 시기 1인무 혹은 2인무로 상연된 처용무는 조선 시기부터 5인이 춤추는 모습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 5인은 청, 홍, 황, 흑, 백의 색으로 각각의 방위로 구분된다. 음양오행에 따르면 청은 동쪽과 봄, 홍은 남쪽과 여름, 황은 중앙, 흑은 북쪽과 겨울, 백은 서쪽과 가을을 뜻한다. 춤의 순서는 5인의 무용수가 각 방위를 뜻하는 색상의 의상을 입고 원을 돌아 한 줄로 등장한다. 이후 사각대형이나 마름모대형을 만든다. 이때 각 방위에서 서로 마주보고 등지기를 하고, 홀로 혹은 다 함께 원을 돌며 액운을 떨쳐내거나 복을 맞이하기도 한다.
처용무를 복원하기 위한 많은 노력 끝에 현대인 또한 처용무를 즐기고 그 가치를 재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처용무의 복원은 여러 문헌과 도상 자료에서 처용무의 흔적을 발굴한 뒤 그러한 자료에 기초해 처용무를 현행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수많은 연구자와 무용수의 노력 속에서 우리는 나례와 연향에서 처용무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 춤사위에 함의된 오행론이 무엇인지 밝힐 수 있었다. 결비로소 처용무는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어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공연되고 있다.

EDITOR 편집팀
문화재청
전화 : 1600-0064 (고객지원센터)
주소 : 대전광역시 서구 청사로 189 정부대전청사 1동 8-11층, 2동 14층
홈페이지 : http://www.cha.go.kr
다양하고 유익한 문화재 관련정보
본 칼럼니스트의 최근 글 더보기
해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