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명사와 국가유산
나누면 결국 돌아온다는 믿음, 그것이 최부자 정신입니다
'경주 최부자 아카데미 최창호 이사'

풍요로움을 판단하는 데는 절대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요즘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 심한 결핍을 느끼는 게 그 증거다.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한다는 강박 속에 내가 가진 것은 절대 내놓지 않겠다는 결의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런 이들은 정말 누구보다 더 큰 부를 쌓을 수 있을까.
청백리 가문, 정직하게 부를 일구다
“경주 최부자집으로 널리 알려진 경주 최씨의 중시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란에 걸쳐 큰 공을 세운 정무공 최진립 장군이십니다. 정무공께서는 당파 싸움이 극심하던 시기에도 두루 존경을 받던 큰어른이자 사후 청백리로 녹선된 관료의 사표이기도 하셨지요. 지금의 경주 최부자 가문은 이런 정무공의 셋째 아들로부터 시작됐습니다.”
최부자 아카데미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최창호 이사는 “어렸을 때는 저희 가문의 내력에 대해 그저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만큼만 알고 있었다”라며 웃었다. 아울러 ‘최부자 아카데미 상임이사’라는 직함에 대해서도 “집안 어른들 심부름 때문에 이곳저곳 많이 돌아다니며 문중의 일을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이라 했다.
하지만 이는 겸양이었다. 이미 2011년 최부자의 뜻을 기리고 그의 행적을 연구하기 위해 독립운동사 전공 교수와 성균관장 등 각계 명사가 참여하는 선양회가 조직된 바 있다. 그리고 경주시에서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문가인 최부자집을 콘텐츠화한 후 그 운영을 선양회에 위탁했다. 그래서 현재 최부자 아카데미는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컸던 최부자의 공적 역할을 연구하는 한편 그로부터 파생되는 다양한 교훈을 더 많은 사람에게 전파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한낱 범부들이 진짜 궁금해하는 점은 따로 있기 마련이다. 최부자는 과연 어떻게 하여 그렇게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을까.

경주 최부자 아카데미 최창호 이사



“병자호란이 지난 후, 선대께서는 농법서를 가까이 두고 많이 공부를 하셨다 합니다. 그래서 개간사업도 적극적으로 펼치시고 수로를 확충해 이양법을 도입하는 등 생산효율을 올리는 일에 많은 애를 쓰셨다고 해요. 다만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지주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최창호 이사는 본격적인 부가 축적되기 시작한 것은 그 이후라며 설명을 이어갔다. “농사의 규모가 커지다 보니 자연스레 소작인도 늘어갔습니다. 소작인의 수가 늘어난다는 건 그만큼 불만도 커진다는 뜻이었지요. 그때 시작된 게 반분작이었습니다. 지주와 소작인이 수확량을 정확히 반반 나누어 간다는 계약이었는데, 그 당시만 해도 7:3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불과 50년 전만 해도 그 비율이 6:4일 정도였고요. 당연히 인근의 다른 지주들이 곱게 보아줄 리가 없었지요.”자신의 이익을 줄이는 선택을 했던 최부자집. 그럼에도 누구보다 빠르게 그리고 정직하게 부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경주 최부자집으로 널리 알려진 경주 최씨의 시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란에 걸쳐 큰 공을 세운 정무공 최진립 장군이십니다.


더 큰 생각이 불러온 더 큰 결과
반분작 계약이 시행되자 소작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농사에 열심이었다. 자신이 노력하는 만큼 더 많은 수확을 가져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른 곳에서 소작을 짓던 이들도 최부자집으로 모여들었다. 같은 강도의 노동을 제공한다면 더 많은 결과물을 기대할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소작인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많아졌지만 전체 생산량이 증가했기에 최부자집 곳간에 쌓이는 곡식의 양도 더 늘어갔습니다. 소작인과 지주 사이의 마름도 없앴지요. 옛말에 지주보다 마름이 더 독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마름의 폐해가 컸습니다. 그런 마름을 없애 소작인들의 어려움을 직접 듣고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다 보니 인심 좋은 부자라는 소문이 사방에 퍼졌지요.”
최창호 이사는 “지금의 최부자집이 있기까지는 반분작 시행이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부를 이루는 과정에 그 어떤 부정도 없었을뿐더러 사회적 존경 역시 급격히 커졌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정직하게 쌓인 재산은 모두 더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해 사용됐다.
“작게는 흉년이 들었을 때 마을 주민들의 구휼을 위해 쌀을 풀었고, 크게는 나라에 큰 어려움이 닥쳤을 때 곳간의 문을 열었지요. 이수성 전 국무총리께서 경주와의 인연을 소개하실 때 “6.25전쟁 당시 대구에서 피란을 가던 중 최부자집에서 나눠주던 주먹밥을 먹고 무사히 목적지인 울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라고 회상하기도 하셨습니다. 정작 저희는 몰랐지만요.” 최부자집의 선행은 수혜를 본 수많은 사람에 의해 기록됐다고 한다. 독립운동 지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희 집안에는 예전부터 다양한 문서가 있었습니다. 그 수가 워낙 많다 보니 항상 창고에 보관만 해두었을 뿐 열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지요. 그런데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그 문서의 의미와 내용을 알게 되자, 집안의 일이 더는 한 가문의 역사로 머물러서는 안 되겠다는 사명감이 생기더군요.”
최창호 이사가 이야기한 그 문서는 간찰(편지)들이었다. 다만 사사로운 내용은 아니었다. 그 대부분은 독립운동과 연관된 것들이었다. 이미 대한제국 당시에도 11대 선조는 일제에 대항하는 의병에 많은 지원을 해 오고 있었음이 당시의 간찰을 통해 새롭게 밝혀졌다. 의병을 이끌던 최익현 선생이 보내온 간찰도 그중 하나였다. 대한광복회 재무부장을 지냈던 12대손인 최준 선생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인 독립운동 지원이 시작됐다. 다만 그 규모와 용처는 파악이 힘들었는데, 이 역시 집안에서 발견된 관찰 덕분에 새롭게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최부자집은 어떤 연유로 그간의 자랑스러운 행적을 알리지 않았을까?




독립운동사에 남겨진 커다란 발자국
“저희 집안 어른들께서는 늘 겸양과 겸손을 잃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선대 여러 어른의 호도 항상 스스로를 낮추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지요. 저희 가문의 유산은 물질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부자가 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다만 청렴한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해요. 남의 것을 빼앗으려 하지 말고, 내 것을 누군가에게 베푸는 일이 결국 나를 이롭게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지요. 저는 그게 최부자 정신의 핵심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자를 나쁘게 생각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이율배반적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경주 최부자의 생애와 가문의 정신을 배우길 바란다고 했다. 그래야 실제 부를 이루었을 때 혼자만이 아닌 모두와 함께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힘줘 말하는 최창호 이사. 그는 지금도 아주 오랫동안 반듯하게 빛나고 있는 경주 교촌의 최부자집을 오롯이 지키고 있다. 더 많은 사람이 더 존경받는 부자가 되는 날이 어서 오도록, 그래서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서 넉넉함을 찾을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EDITOR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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