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근대역사기행
아직도 또렷한 식민지 수탈과 현대 산업화의 흔적
'군산 내항 역사문화공간'

군산항은 1899년 5월 1일 개항되었다. 개항 전부터 군산에 들어오기 시작한 일본인의 수는 개항 이후 폭발적으로 늘었다. 일제는 호남평야의 쌀을 원활히 반출하기 위해 전주~군산 간 신작로(1908년)와 익산~군산 간 군산선 철도(1912년)를 개설했다. 1926년부터 1938년 사이에는 뜬다리 부두시설 6기를 군산 내항에 설치해 3,000톤급 기선의 정박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일제가 군산 개항을 원했던 이유
개항 당시의 군산은 인구 588명(조선인 511명, 일본인 77명)의 작은 어촌이었다. 하지만 불과 2년 만인 1901년에는 1,449명으로 크게 늘었다. 조선인은 921명으로 2배 정도 증가했지만 일본인은 472명으로 무려 6배 이상 증가했다. 당시 군산에 쏠린 일제와 일본인들의 관심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게 한다.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의 독점을 견제하기 위해 개항지마다 ‘각국 공동거류지(조계지)’를 설정했다. 하지만 조계지에 들어온 외국인은 일본인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다. 극소수의 중국인과 미국 선교사를 제외한 다른 나라 사람들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대부분의 개항지가 사실상 일본인들의 전관거류지였던 셈이다.
일찍이 군산 개항을 원했던 일제는 군산 개항이 결정되자 내항 일대의 토지 확보를 서둘렀다. 일본인들이 정착하기에 좋은 여건과 생활 기반이 순차적으로 갖춰진 군산 내항에는 목포 일본영사관의 분관도 설치됐다. 일제는 일본인들의 정착과 상업 등에 필요한 각종 시설을 구축함으로써 마침내 군산을 독점적으로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군산근대건축관으로 활용중인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건물



일제는 개항도시 군산을 식민지 수탈 거점으로 활용했다. 군산항을 통해 호남평야의 곡식을 일본으로 반출해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서는 침략 전쟁의 중요한 지원 거점으로 삼았다.
실제로 군산이 개항된 이후에 일본인들은 군산을 비롯한 전북 지역의 농경지 소유 면적을 크게 늘렸다. 1930년대 통계에 따르면 군산부의 토지 면적 중 80%, 인근 옥구군의 농경지 60%는 일본인들의 소유였다고 한다. 조선인 지주들을 고리대금으로 옭아매 착취하거나 대규모 자본을 무차별적으로 투입한 결과였다. 하루 아침에 농토를 잃고 소작농이 된 조선인 농민들은 결국 고향을 떠나 도시의 저임금 노동자나 빈민으로 전락했다.

조수간만의 차가 큰 군산 내항에 일제가 총 6기를 설치한 뜬다리



‘콩나물고개’와 ‘뜬다리’ 이야기
일제가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뒤로 많이 늘어난 일본인들은 군산역 부근의 조선인 거주지까지 파고들었다. 조선인들은 개복동, 대정동, 장재동, 송창동 등지의 구릉과 산비탈 지역으로 밀려났다. 조선인 밀집 지역에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서 고향을 떠나 군산항 주변으로 몰려든 사람들의 초가와 움막집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멀리서 보면 마치 콩나물시루의 콩나물처럼 많은 집이 몰려 있다고 해서 ‘콩나물고개’로 불리기도 했다. 콩나물고개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의 주요 일터는 군산 내항이었다. 군산 내항은 금강 하구에 위치한다. 강물에 떠밀려 온 토사가 수시로 쌓이고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썰물 때는 큰 배가 드나들기 어렵다. 일제는 대형 선박을 이용해 군산 내항의 쌀 반출량을 늘리기 위해 1905년부터 1938년까지 4차례의 축항공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뜬다리 부두와 호안시설, 창고와 철도 등이 설치됐다.
‘부잔교’라고도 불리는 뜬다리는 물에 뜨는 콘크리트 구조물의 정박시설, 그 정박시설과 육지를 연결하는 다리로 이루어졌다. 조수간만의 차에 따라 다리를 위아래로 움직일 수 있게 만들었다. 뜬다리 부두는 제3차 축항공사기간(1926~1933년)에 3기, 이후에 다시 3기가 추가되어 총 6기가 설치됐다. 1926년 뜬다리 부두의 준공식에는 당시 조선총독인 사이토까지 참석했다고 한다. 현재 뜬다리는 3기만 남았지만, 같은 시기에 축조된 호안시설은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군산 내항에 뜬다리 부두가 완공된 뒤로는 3,000톤급의 기선 여러 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어서 일본으로의 쌀 반출량은 크게 증가했다. 내항 일대에 산더미처럼 쌓인 쌀가마니를 일본 화물선에 옮겨 싣는 일은 조선인 노동자들의 몫이었다. 조선인은 일본인의 절반이나 절반도 안 되는 임금을 받으며 하루 12시간 이상 고된 노동을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01. 2층규모의 서양식 건물로 지어진 구 군산세관 본관 02. 관광용 시설물로 일부만 남겨진 군산 내항철도
03. 중화요리점 특유의 내부 모습을 간직한 군산 빈해원 04.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 대지주의 저택이었던 신흥동 일본식 가옥

군산 ‘근대유산투어’의 필수 경유지
2018년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된 군산 내항 역사문화공간의 총 면적은 152,476㎡에 이른다. 그중 3분의 2가량 차지하는 육상 구역은 길이 약 1km, 너비 200m 내외에 불과하다. 넓지 않은 그 공간에 일제가 설치한 뜬다리 부두, 호안시설, 내항 철도와 1970년대 건립된 경기화학약품상사 저장탱크, 구 제일사료 주식회사 공장 등의 개별 국가유산이 분포한다.
1931년에 내항 전체에 부설됐던 철도는 화물열차의 통행이 끊긴 지 오래되었다. 지금은 꽃길이나 산책로로 바뀐 구간도 있지만, 상당수는 레일만 남긴 채 도로에 묻혔거나 풀밭으로 변했다. 고도 성장의 산업화 시대 유산인 구 제일사료주식회사 공장도 본래 기능은 상실하고 외형만 남았다. 반면에 경기화학약품상사 저장탱크는 원래 주정을 담았지만 지금은 당밀 등의 저장탱크로 제구실을 다 하고 있다.
군산 내항 역사문화공간 주변에는 군산을 찾은 여행자라면 반드시 한 번쯤 들러볼 만한 근대문화유산이 즐비하다. 그 대표적인 곳이 1908년에 단층의 서양식 건물로 지어진 구 군산세관 본관(사적)이다. 일제강점기에 군산항을 통해 드나들던 물품의 관세를 거뒀던 곳이다. 원래는 감시계 청사, 감시 망루 등의 여러 시설물과 함께 있었으나 현재는 본관과 창고만 남았다.
구 군산세관 본관 근처에는 구 일본제18은행 군산지점(국가등록문화재)이 있다. 이 은행은 일본으로 쌀을 반출하고 토지를 강제 매입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됐다. 해방 후에는 대한통운에서 사용하다가 지금은 군산근대미술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군산근대미술관에서 동쪽으로 120m쯤 걸어가면 1922년에 준공된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국가등록문화재) 앞에 도착한다. 2층 건물이면서도 4층 건물만큼이나 높다. 이 은행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삼은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도 등장한다. 해방된 뒤에는 한일은행 군산지점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군산근대건축관으로 재탄생됐다. 군산근대건축관의 앞길 건너편에는 화교 상인이 운영하는 중화요리점인 군산 빈해원(국가등록문화재)이 자리 잡았다. 오래전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중화요리점의 독특한 내부가 지금껏 간직돼 있다. 그 밖에 ‘히로쓰가옥’으로도 불리는 군산 신흥동 일본식 가옥(국가등록문화재)도 들러볼 만하다. 일제강점기 군산에 살았던 일본인 대지주의 2층 저택이다. 건립 당시의 원형이 잘 보존돼 있어서 <타짜> 등 유명 영화의 촬영지로 등장한 적도 있다. 사실 군산 원도심 일대는 전체가 근대문화유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일본식 가옥과 일제가 남긴 근대문화유산이 많다. 특히 소문난 빵집이나 중화요리점 같은 맛집도 한둘이 아니어서 미각여행의 즐거움까지 덤으로 누릴 수 있다.

EDITOR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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