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땅속으로 古go
경복궁 광화문 월대를 찾아 기록하다
'궁궐 안과 밖을 이어주는 공간'

월대(月臺)는 경복궁 근정전이나 강녕전, 창덕궁 인정전처럼 궁궐의 중요 건물지에 설치된 넓은 대(臺)로 월견대(月見臺) 즉, 달을 바라본다는 뜻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광화문 월대는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앞에 설치된 길고 높은 단을 이룬 건축물로 주변보다 높게 조성되었다. 조선시대 궁궐 정문에 설치된 월대 중 양쪽에 난간석이 둘러진 경우는 광화문 월대가 유일하다.

경복궁과 광화문 월대 전경



기록 속 광화문 월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1394년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고 새로운 도읍 한양에 경복궁을 건설하였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에는 1866년 고종년간에 월대가 축조되었고, 이후 1910~1920년대 일제강점기에 전차선로가 부설되면서 월대의 난간석은 해체되고 월대의 모습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다면 월대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된 한자는 ‘越臺’ 또는 ‘月臺’의 두 가지로 기록되어 있는데 ‘月臺’라는 한자가 많이 쓰였으며, 주로 왕실의식이나 행사와 관련하여 언급된다. 이로 볼 때 월대는 궁궐 중요 건물지의 사방 또는 전면에 설치된 것으로 주변보다 높아 건물의 위엄을 한층 돋보이게 했을 것이다. 광화문 월대는 궁궐 건물지처럼 주위에 설치된 것이 아니라 경복궁의 정문 즉, 광화문 앞에 설치되었다. 따라서 지붕과 같은 상부구조물은 없다. 그럼에도 월대라 부르는 것은 이 역시 주변보다 단을 높이고 넓은 대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궁궐 문 앞에 월대가 설치된 것은 광화문뿐 아니라 창덕궁 돈화문, 경희궁 흥화문, 덕수궁 대한문 등이 있다. 하지만 광화문 월대처럼 양쪽으로 난간석을 둘러 장식한 경우는 광화문 월대가 유일하다.

左)광화문 전경(도서출판 서문당 제공) 右)광화문 동쪽 측면 전경(국사편찬위원회 제공)

발굴을 통해 드러난 광화문 월대의 모습
광화문 월대에 대한 축조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경복궁 영건일기」이다. 낭청(廊廳) 원세철(1817~미상)이 편찬한 이 기록에는 1866년 고종 3년에 ‘광화문 앞에 월대를 쌓았다. 모군이 궁 안에 쌓아둔 잡토를 지고 왔는데, 실로 4만여 짐에 이르렀다’고 되어 있다. 이 기록과 부합하는 실물자료가 바로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났다.
광화문 월대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은 사진자료에서 찾을 수 있다. 1890년대에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광화문 사진에는 월대 난간석과 함께 남쪽 전면 3군데에 계단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910~1920년대에 다수의 사진자료에서도 광화문 월대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광화문 앞 월대가 점차 사라지는 모습 또한 추정할 수 있다.
광화문 월대의 모습이 확인된 것은 이번 발굴조사가 처음은 아니다. 2007년 광화문지 조사 당시 월대의 동서 너비 29.7m와 임금이 지나던 길인 어도지가 드러났다. 그러나 전면조사는 아니어서 광화문 월대 전체를 확인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광화문 월대가 땅속에 어느 정도 남아있는지, 남북길이는 어느 정도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해결할 수 없었다.
조사과정에서 최근까지 이용된 도로면을 걷어내자마자 가장 먼저 육안으로 확인된 것은 일제강점기 전차선로의 흔적이었다. 조사구역 남쪽에는 ‘Y’자형의 1926~1927년에 부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복선의 전차선로 침목이 확인되었고, 아쉽게도 이로 인해 월대 기단과 어도지, 남쪽 계단지를 비롯한 일부는 훼손되었다.
조사결과 광화문 월대는 동서너비 29.7m, 남북길이 48.7m의 전체 규모가 확인되었고, 광화문 중앙문과 이어지는 너비 7m의 어도지 기초시설이 확인되었다. 평면형태는 역철자형으로 중앙 어도계단지가 동편계단지보다 약 4m 돌출된 구조이다. 월대 기단은 높이 70cm 정도의 2단으로 축조되었는데 일부 훼손되긴 했으나 동·서·남쪽에서 모두 확인되었다. 기단에 사용된 석재는 화강암재로 길이 120~270cm의 잘 다듬은 장대석을 이용하여 쌓았으며, 기단 뒤쪽으로는 할석과 점토를 채워 보강하였다.
월대의 끝인 남쪽에는 어도계단지와 동편, 서편계단지가 조사를 통해 드러났다. 어도계단지는 일부 훼손되긴 했으나 양쪽으로 소맷돌 지대석이 남아있어 너비 약 7m임을 확인할수 있었고, 동편계단지는 3단으로 너비 11m로 확인되었다. 월대 남쪽에 위치한 계단지 발굴조사에서 밝혀진 새로운 사실은 남아있는 계단지 형태를 통해 월대의 변화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어도계단지는 처음 확인될 때 계단의 형태가 아닌 비스듬한 경사로의 형태로 확인되었다. 어도계단지의 단과 단 사이에는 괴석과 잡석이 채워져 있었고, 동쪽 소맷돌 위에는 크고 작은 할석이 놓여 있었다. 이를 통해 본래 계단으로 사용되다가 경사로로 변형되면서 구조가 바뀌었음이 확인되었다.
특히, 주목되는 점은 어도계단지 양쪽에 소맷돌 지대석이 발굴을 통해 드러났다는 점이다. 이 지대석은 잘 다듬어진 석재로 소맷돌이 놓이는 부분은 파서 홈을 이루는데 경복궁 근정전 계단에서 확인된 용두석과 유사한 소맷돌이 올라간 것으로 보인다. 동편계단지 역시 동쪽 끝부분에 남북방향으로 장대석을 놓은 소맷돌이 확인되었는데 이로 볼 때 처음에 넓은 계단지로 이용되다가 경사로로 바뀌면서 대부분 묻히고 너비 130cm의 협소한 계단의 형태로 축소 변형되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左)월대 전경 右上)월대 남쪽 전경(어도계단지와 동편계단지) 右下)월대 어도계단지 소맷돌과 지대석 모습

광화문 월대 발굴의 의미와 복원 계획
경복궁 광화문 앞에는 고종년간에 주변보다 높은 단을 이루는 월대가 존재했다. 또한, 고종년간 월대 어도지 하층에는 앞선 시기의 쇠고리가 박힌 방형석재와 석렬로 이루어진 또다른 유구가 확인되었다. 이는 광화문 앞 공간이 오래전부터 궁궐과 연관되어 활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광화문 월대는 단순히 경복궁의 일부를 이루는 건축물만은 아니다. 경복궁의 끝이자 시작이며, 궁궐 밖 중심도로인 육조거리와 궁궐을 이어주는 공간으로써 의미가 있다.
이번 조사에서 월대에 사용된 난간석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옛 사진 속 난간석과 일치하는 부재들이 다수 동구릉에 남아있어 이를 이용하여 월대가 복원될 예정이다. 올해 10월, 광화문 앞에는 땅속에 묻혀 존재를 알 수 없었던 월대가 복원되어 국민에게 개방될 예정이다. 경복궁의 새로운 모습을 기대해 본다.

EDITOR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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