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근대역사기행
일본제국주의가 만든 군항도시의 근대 유적
'진해 근대역사문화공간'

진해는 경술국치 직후 일본제국주의의 해군기지로 만들어진 계획도시이다.
오늘날의 중원광장을 가운데에 두고 8갈래로 뻗은 도로변에는 일본식 장옥거리도 조성됐다. 진해역과 중원광장 사이의 중원로를 중심으로 형성된 진해 근대역사문화공간에는 1910년대의 건축물도 여럿 남아 있다.
일본인들만의 세상으로 탈바꿈한 ‘중평한들’
1894년 청일전쟁에 이어 1904년 러일전쟁까지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침략 야욕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해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더니 5년 만인 1910년 8월 29일에는 한일병합조약을 발표했다. 이른바 ‘경술국치’를 통해 조선의 국권을 강탈하고 식민지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진해를 군항도시로 만들려는 일본의 계획은 이미 1905년부터 진행됐다. 지금의 경남 창원시 진해구 중앙동 일대는 당시 웅천현에 속하는 ‘중평한들’이라는 넓고 비옥한 들녘이었다. 1905년 12월 도만포(지금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다구리)에는 일본 군인들과 측량사들이 상륙했다.

진해 근대역사문화공간 전경. 가운데에 둥그런 중원로터리(중원광장), 오른쪽에는 제황산공원이 보인다



군항 예정지 획정을 위한 사전작업을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염전이나 논, 밭 할 것 없이 마음대로 측량작업을 해대자 주민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논밭에 들어온 일본인들을 밀쳐 내거나 측량장비를 넘어뜨리고 주먹다짐을 하는 등의 방법으로 일본인 측량사와 군인들을 쫓아냈다. 이듬해 가을에도 황토색 군복에 완장을 찬 일본 헌병들이 총검을 앞세우고 진해 일대에 나타났다. 헌병들은 측량 예정지에 일정한 간격으로 칼을 꽂거나 총을 세워놓고 주민들의 접근을 막았다.
1906년에 일본은 진해 일대에 해군 군항 도시를 만들기 위해 조선인들의 토지를 강제 매수했다. 대대손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약 2,000명의 주민들을 경화동으로 이주시켰다. 1910년에는 일본 해군건축성 진해지부가 설계한 ‘진해군항 대시가 계획도(鎭海軍港大市街 計劃圖)’에 따라 중평한들의 한가운데에 서 있던 팽나무 고목을 중심으로 8갈래의 도로가 뻗어나간 ‘방사직교형’ 시가를 완성했다. 지금의 ‘중원로타리(중원광장)’ 한복판에 서 있던 팽나무는 1950년대에 고사했다. 수령이 무려 1,200살이었다는 이 고목은 주민들의 수호신 같은 당산나무이자 소중한 쉼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8갈래의 도로가 개설된 뒤로는 더 이상 쉬어 가는 공간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내내 진해 신도시는 조선인들의 주거가 허락되지 않은 일본인들만의 세상이었다고 한다.

01. 진해에서 처음 국가등록문화재로 등재된 진해역 02. 2020년 진해충무지구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새롭게 단장된 보태가
03. 1938년에 처음 건축됐다는 화천동 근대상가주택 (벚꽃마루) 04. 커피 전문점으로 재탄생한 송학동 근대상가주택의 1층



진해역 광장과 해군사관학교 정문 사이에는 약 980m 길이의 중원로가 남북 방향으로 개설돼 있다. 그 길의 중간쯤에 위치한 중원로타리에서는 중원로, 벚꽃로, 편백로, 백구로의 4개 도로가 8개 방향으로 뻗어 있다. 진해 근대역사문화공간 내의 국가등록문화재 건물들 대부분도 이 도로들의 길가나 가까이에 있어서 찾아가기가 쉽다. 먼저 1926년 11월 진해선의 개통과 함께 영업을 시작했다는 진해역부터 둘러봤다. 유럽풍의 지붕창을 갖춘 아담한 역사이다.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된 2005년 이후에도 영업을 계속하다가 2015년 2월 1일부터 여객 취급을 중단했다. 열차 승객들의 발길이 뚝 끊긴 탓에 역 앞의 드넓은 광장이 더욱 썰렁해 보인다. 진해역에서 가장 가까운 국가등록문화재 건물은 100m 거리의 구 태백여인숙이다. 하지만 주인 할머니가 건강 문제로 집을 떠난 뒤로는 철제 대문이 굳게 잠겨 있어 내부를 둘러볼 수 없다.
진해역과 중원로타리 사이의 중원로를 걷다 보면 보태가, 화천동 근대상가주택, 송학동 근대상가주택을 잇달아 만나게 된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보태가는 여러 차례 증개축을 거듭해 오다가 2020년 진해충무지구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말끔히 단장됐다. 이곳 1층에는 오랫동안 ‘보민의원’이 자리 잡았고, 다다미방으로 꾸며진 2층은 일본식 주택 관사로 사용됐다고 한다. 길 건너편의 화천동 근대상가주택도 도시재생사업을 거친 덕택에 근래 지어진 건물처럼 안팎이 번듯하다.

左) 진해 근대테마거리의 해군 병사 조형물과 뾰족한 지붕이 돋보이는 육각집 右) 두 개의 큰 도로가 만나는 모서리 지점에 자리 잡은 황해당인판사



진해 근대역사문화공간의 등록문화재 건물들 가운데 구 태백여인숙, 육각집, 창선동 근대상가주택 등 3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제구실을 다하고 있다. 보태가는 창원시도시재생지원센터, 화천동 근대상가주택은 복합공간인 벚꽃마루, 송학동 근대상가주택은 커피숍과 보험대리점, 대흥동 근대상가주택은 미용실과 음식점, 흑백다방은 문화공간, 일광세탁은 세탁소와 새시 전문점, 황해당 인판사는 도장 전문점 등으로 운영되고 있다.
1912년에 지어졌다는 흑백다방과 육각집은 한번쯤 찾아볼 만하다. 그중 흑백다방은 서양화가 유택렬 화백이 1955년에 인수한 칼멘다방을 개명한 곳이다. 2008년까지 지역 문화예술인의 사랑방 구실을 해 오다가 지금은 유 화백의 딸이자 피아니스트인 유경아 씨가 거주하며 연주회장, 문화공간 등으로 활용하고 있다. ‘육각정’, ‘뾰족집’ 등으로도 불리는 육각집은 진해 근대역사거리의 가장 도드라진 건물이다. 3층 꼭대기의 뾰족한 육각지붕이 쉽게 눈에 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곳에서 영업하던 식당이 문을 닫은 뒤로는 빈집이 되었다.
중원동로와 백구로가 만나는 모서리 지점에 자리한 황해당인판사도 진해 근대역사문화공간의 명물이다. 100년을 훌쩍 뛰어넘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완벽한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1층은 도장 파고 인쇄하는 가게, 2층은 주인 정기원 씨의 살림집으로 쓰이고 있다. 흑백다방과 육각집도 1913년 5월 27일에 촬영된 일본해전 기념식 때의 진해 전경 사진에서 쉽게 눈에 띈다. 무려 120년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고옥들이다. 국가등록문화재는 아니지만, 진해우체국(사적)도 빼놓을 수 없는 문화유산이다. 1912년 10월 25일에 준공됐다는 이 절충식 목조건물은 외관이 아름답고 이국적이다.
진해 근대역사문화공간과 원도심 일대를 걷다 보면 진해가 따뜻하고 편안한 도시라는 생각이 든다. 군항도시라 삭막할 거라는 선입견도 슬그머니 사라졌다. “언젠가 한 번쯤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도 생겼다. 진해의 매력을 재발견한 여행이었다.

EDITOR AE류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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