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궁능, 연결해 보기
못싀 잠긴 룡, 궁궐 속 세자의 공간 모아보기
'경복궁과 창덕궁 속 세자의 공간'

잠룡(潛龍)은 연못에 잠겨 있는 용이라는 뜻으로 아직 날지 못한 용,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인재를 뜻한다. 차기 왕이 될 세자도 잠룡이라고 칭한다. 새로운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르듯 궁궐 동쪽에는 세자의 공간이 있다. 그래서 세자의 공간을 ‘동궁(東宮)’이라고 부른다.
경복궁 속 세자의 공간
경복궁이 창건될 때 세자는 궁 밖에서 따로 살았다. 궁 안에 세자궁을 짓기 시작한 것은 세종 9년(1427)부터이다. 이 무렵 세자(문종, 1414~1452, 재위 1450~1452)와 세자빈이 머무는 자선당(資善堂)과 세자의 집무공간인 승화당(承華堂)이 경복궁 동쪽, 건춘문 부근에 완성되었다. 세종 23년(1441) 세자빈 권씨는 자선당에서 단종(1441~1457, 재위 1452~1455)을 낳았다. 그러나 권씨는 하루 만에 숨을 거두었고, 세종은세자를 위해 궁 밖에 처소를 마련해 주었다. 이후 자선당과 승화당은 세종이 정사를 보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경복궁 자선당



세종 25년(1443) 왕은 세자의 정무 능력을 키우기 위해 대리청정을 명하면서 새로운 세자의 정무 공간인 계조당(繼照堂)을 지었고 실제 세자는 이곳에서 신하들과 접견하여 정무를 보았다. 그러나 세자 시절 7년이 넘도록 군주 연습을 한 문종에게 동궁의 정무 공간은 좋은 기억을 주지 못했나 보다. 문종은 계조당과 승화당을 헐어버리길 원했고 그의 사후 두 전각은 헐렸다. 이후 고종이 경복궁을 복원할 때 세자가 하례를 받도록 계조당을 다시 지었으나 승화당은복원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경복궁이 훼손되면서 계조당은 또다시 헐렸고, 2020년부터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에서 복원 공사를 진행하여 올해 완공될 예정이다.
현재 동궁 권역으로 공개되어 있는 전각은 자선당과 비현각(丕顯閣)뿐이다. 자선당 동쪽에 있는 비현각은 기록상으로 세조 때 처음 등장한다. 자선당이 세자의 처소이면, 비현각은 세자의 집무공간이었다. 두 전각 모두 일제강점기 때 훼손되었다가 1999년 복원되었다. 그런데 경복궁 북쪽 건청궁 한편에 검게 그을린 자선당 유구가 있다. 이것은 자선당의 기단으로 일제강점기 때 자선당이 일본 오쿠라 호텔 별채로 옮겨졌다가 관동대지진으로 화재를 입고 남겨진 것을1995년 김정동 교수가 찾아 반환된 것이다. 부재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복원에 활용할 수는 없었으나 아픈 역사의 흔적을 잊지 않기 위해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옮겨 놓았다.

왼쪽부터 경복궁 비현각, 복원 중인 경복궁 계조당, 창덕궁 삼삼와와 승화루, 창덕궁 의두합

창덕궁 속 세자의 공간
창덕궁 후원으로 가는 넓은 길목 한가운데 세자의 정무 공간인 중희당(重熙堂)이 있었다. 정조 6년(1782) 후궁 의빈 성씨가 아들을 낳은 해에 왕이 세자를 위해 지은 창덕궁 동궁의 중심 전각으로, 창경궁 동궁인 저승전과 시민당이 소실된 후 세웠다. 중희당은 앞마당이 넓고 높은 기단을 갖추었으며, 동쪽에는 삼삼와(三三窩)와 승화루(承華樓)가 있었고, 서쪽에는 성정각(誠政閣)과 관물헌(觀物軒)이 있었다. 모두 세자의 서재이자 학문을 하던 공간이었다.의빈 성씨의 아들은 세 살 때 중희당에서 세자 책봉례를 치르고 문효세자가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다섯 살 때 죽었다.
이후 순조(1790~1834, 재위 1800~1834)가 태어났고, 길한 날을 기다려 정조 24년(1800) 순조가 열한 살 때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런데 그해에 정조가 사망하고, 순조는 왕이 되면서 정작 정조의 아들들은 제대로 중희당을 사용하지 못했다. 고종 28년(1891) 실록에 중희당을 옮겨 지으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후 중희당은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중희당 동서의 전각들인 삼삼와와 승화루, 성정각과 관물헌만이 남아 있다.

창덕궁 성정각



창덕궁의 동궁을 가장 적극적으로 이용한 세자는 순조 아들 효명세자(추존 문조, 1809~1830)이다. 세자는 관물헌에서 다섯 살 때 천자문을, 여덟 살 때 『소학』과 『격몽요결』을 익혔다. 순조 17년(1817)에는 성정각에서 입학례를 치렀다. 효명세자는 순조 27년(1827)부터 대리청정을 맡아 동궁에서 신하들을 접견하여 정무를 보고 학문을 수양하였다. 당시 외조부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기로, 세자는 외척을 견제하고 왕권을강화하는 정치 개혁에도 적극적이었다. 또한 할아버지 정조와 같이 궁궐 영건에도 힘을 써, 후원에 아버지를 위한 연경당(演慶堂)을 지었으며, 자신의 서재인 의두합(倚斗閤)도 지었다.
이렇듯 동궁은 세자가 제왕의 능력과 품성을 기르던 곳이었다. 역사의 상흔으로 오늘날 궁궐 속 세자의 전각들이 온전히 남아 있지 않지만, 효명세자의 시를 통해 제 역할을 다하던 동궁의 정취를 느껴볼 수 있다.

EDITOR AE류정미
문화재청
전화 : 1600-0064 (고객지원센터)
주소 : 대전광역시 서구 청사로 189 정부대전청사 1동 8-11층, 2동 14층
홈페이지 : http://www.cha.go.kr
다양하고 유익한 문화재 관련정보
본 칼럼니스트의 최근 글 더보기
해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