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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No problem

2022-09-28

문화 문화놀이터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No problem
'글. 유병숙'

    마당바위에 오르니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자주 형상을 바꾸며 흐르는 구름이 한가로웠다. 귓속으로 새소리가 흘러들었다. 청아한 새의 지저귐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문득 양수리 친구의 낭랑한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그냥 여기에 앉아있어.” 순간 마음을 쥐고 흔들던 상념들이 바람에 흩어지는 검불처럼 시나브로 사라졌다. 바위를 둘러싼 아름드리 소나무들은 친구네 한옥 마당귀에 우뚝 서 있던 소나무를 연상케 했다. 바람이 불어왔다. 초록 물결이 일었다. 
    친구와 나는 이웃해 살았다. 그녀는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맏며느리였다. 여섯 살 연상인 그녀와 나는 동갑내기 아이들 때문에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서로 마음이 맞아 의기투합하는 일이 잦아졌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망년우(忘年友)가 되었다. 
    자주 만나니 그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안 보고도 알 지경이었다. 나는 걸핏하면 핑계를 대  마실을 가곤 했다. 하루는 현관문을 여니 산더미처럼 쌓인 옷을 개키며 그녀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노래는 그녀에게 있어 일종의 방어기제였다. 또 무엇이 그녀를 힘들게 한 걸까? 사정을 듣기도 전에 속부터 상했다. 하지만 궁금해하는 내 눈치를 애써 외면한 채 그녀는 No problem!이라며 응대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부부 사이에 문제가 없으면 No problem이란다. 그녀는 그간 얼마나 많은 사연을 No problem으로 풀어버린 걸까?  





    친구는 친정과 멀지 않은 곳에 한옥 한 채를 마련했다. 방학 때마다 아이들은 신이나 그 집으로 몰려갔다. 처음 한옥에서 묵던 밤, 칠흑 같은 어둠과 마주하게 되었다. 한 번도 맞닥뜨리지 않은 어둠이었다. 가만히 있어 봐. 곧 잘 보일 거야. 친구의 말에 눈의 힘을 풀고 조리개가 열리길 기다렸다. 어둠이 물처럼 몰려와 나를 포근하게 감싸 안는 듯했다. 우리는 마루에 걸터앉아 강도 높은 하늘의 별들을 헤아렸다. 시간이 천천히 흘러갔다.  
    어느 해인가 추석을 앞두고 아이들이 졸라대는 통에 얼떨결에 양수리에 가게 되었다. 차례 준비로 마음이 바빠 후딱 다녀올 요량이었다. 들뜬 아이들은 한옥에서 하룻밤 자고 가자며 보챘다. 홀로 애쓰실 시어머니 생각에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머리가 지끈거리더니 급기야 열이 올랐다. 핼쑥해진 내 얼굴을 본 친구가 “나보다 귀한 건 없어. 마음 편하게 먹고 하룻밤 쉬었다 가자.” 권했다. 그 말이 마치 주술처럼 들려왔다. 죄송하다고 전화 드리자 시어머니는 아이들이 좋다고 하는데 무슨 소리냐? 걱정 말고, 아예 며칠 더 있다 오라 하셨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그냥 여기에 앉아있어.” 나만 남겨 놓은 채 그녀는 누렇게 익은 벼가 비단결처럼 출렁이는 들판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나갔다. 햇빛 바른 툇마루 앉아 코발트 빛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하늘 바라기하며 여유를 부려본 게 얼마 만인가? 나도 하나의 풍경이 되어 앉아 있었다. 풍경 바라기를 하는 동안 가슴앓이가 가라앉고 거짓말처럼 마음이 고요해졌다. 그 후 가슴에 소용돌이가 이는 날이면 나도 모르게 그녀의 말을 떠올리곤 했다.





    교직에 있던 남편이 퇴임하자 친구는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양수리로 들어갔다. 일곱 남매의 시댁 식구를 거느린 종부로서 굴곡 많은 시간을 견뎌낸 그녀는 노년을 맞이하는 게 오히려 반갑다고 했다. 이제 느긋하게 황혼을 즐기고 싶다고도 했다. 하지만 무슨 팔자인지 늘그막에 시작된 병수발은 친정 부모, 시부모, 친척까지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없이 이어졌다. 요양시설을 마다하고 어르신들을 집에서 모셨다. 그녀의 일상은 온전히 병수발에 함몰되었다.  
    강가의 한 찻집에서 그녀를 만났다. 느릅나무 껍질처럼 거칠어진 손을 잡았다. 그새 흰머리가 많이 늘었다. 내 염려와는 다르게 친구는 여일하게 잘살고 있다며 예의 No problem을 되뇌었다. 웃고 있지만, 얼굴에 드리운 그늘을 지울 수는 없었다. 저 속이 어떨까?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한동안 소식이 끊어졌다 이어지길 반복했다. 그녀의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듣고 부랴부랴 빈소를 찾았다. 그제야 병수발의 족쇄에서 풀려난 그녀는 날개 죽지가 꺾인 새처럼 기진한 표정으로 나를 맞았다. ‘나는 이제 고아야!’ 다 늙은 여인네가 울먹였다. 나는 그녀를 보듬고 어깨를 두드리며 애써 눈물을 감추었다.
    하루는 잘 지내냐고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소소하게 생기는 일로 인해 감사하고, 어떤 일도 끄떡없이 패스시키고, 집에 오는 손님들로 인해 웃고 떠들고, 밤에는 곯아떨어져서 자고 새벽에는 하루를 설렘으로 맞이하고 있어. 두 부부가 나란히 걸어가는 게 참 행복이야. 많이 행복해.”라는 답장이 왔다. 매사 No problem을 외쳐대던 친구는 인생의 한 소식을 얻은 듯했다. 지나고 보니 세상에 의미 없는 시간이란 없다. 달관한 듯한 친구의 말이 부럽기도 하고 한편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생각에 잠긴 사이 산그늘이 내려와 산자락을 덮고 있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데 카톡이 날아왔다. “내일 고추 심는데 올래?” No problem! 나의 가슴엔 벌써부터 빨갛게 익은 고추가 들어와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