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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원을 담는 민화의 무궁무진한 변신

2022-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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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원을 담는 민화의 무궁무진한 변신
'서양화가 김민수'

    기원전 1만5000년 ~ 기원전 1만 년경 작품으로 추정되는 <알타미라 동굴 벽화>속에는 위협적인 자연과 야수에게서 벗어나 사냥에 꼭 성공하길 바라던 구석기 사람들의 염원이 담겼다. 우리 선조들 역시 다산과 입신양명을 바랄 땐 물고기와 게를 화폭에 담았고, 부귀와 행복을 꿈꾸면 모란을 그렸다. 김민수 작가 역시 그런 보통 사람들의 염원을 담는다. 민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새로운 장르로 변주하는 김민수 작가를 만났다. 


팝아트와 민화, 그 사이
    김민수 작가의 어린 시절에는 늘 우리 전통의 아름다움이 함께했다. 어렸을 적 외가에는 외할머니가 모은 고가구나 도자기 같은 옛 물건이 많았고 다도를 하시던 어머니는 한복과 꽃신 속 전통 문양의 의미를 설명해 주셨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후 극사실주의,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 작업을 했지만, 있는 모습 그대로를 그리는데 벗어나 자신만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 그때 수많은 상징을 담아내는 민화가 눈에 들어왔다.



    “민화는 단순히 ‘보는 그림’을 넘어 ‘읽는 그림’이기도 합니다. 무명의 화가가 주변에서 보는 광경, 모든 사물이나 현상을 소재로 하기에 보통 사람들의 생생한 삶이 담겨 있어요. 또 꽃이나 새, 물고기, 산수나 자연현상 같은 그림 안에 부귀영화나 출세를 바라는 소망을 함께 담아냅니다. 화려한 색 속에 숨어 있는 상징이 무척 재밌었어요.”
    민화 속 도상을 시작으로 이론을 공부하기 시작한 그는 전통 민화의 형식을 벗어나 자신에게 익숙한 서양화 표현 방식으로 독특한 작품을 내놓았다. 한지가 아닌 캔버스에 전통 안료 대신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는데 성격이 급한 탓에 물감이 채 마르기 전에 드라이어로 말리며 그림을 그린다.
    “차분한 색감보다는 화려하고 선명한 색을 좋아해요. 어쩌면 민화의 이론만 공부하고 그리는 법을 배우진 않아 더 자유롭게 표현하게 된 것 같습니다. 사람의 욕망과 염원을 담는게 그림의 가장 원시적인 출발이기도 하잖아요? 빨리 마르고 계속 덧칠할 수 있는 아크릴 물감이 그 표현을 더 강렬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아요.” 
그림 속에 담긴 인간의 솔직한 욕망
    김민수 작가의 대표작인 <책거리> 시리즈에는 모란, 닭, 호랑이와 용 같은 전통적인 문양과 슈퍼맨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 스타벅스 커피, 하이힐과 명품 가방 등 현대적인 물건이 동시에 등장한다. 캐릭터된 자신의 모습과 ‘보통 사람들’로 상징되는 개미도 곳곳에 숨어 있다.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강렬한 색감과 명료한 선이 두드러지고 만화의 형식을 차용해 대중적인 이미지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팝아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언뜻 현대 물질문명을 비판하는 것 같지만 이는 반대로 민화처럼 우리의 솔직한 욕망을 표현해 낸 작가만의 상징이다.
 
左) PVC 토이 위에 페인팅한 전통도자기_용      右) 호랑이가 전하는 현대의 부귀영화 150X150cm. 2점 Acrylic on canvas. 2010-2011 

    “조선시대의 민화에서 책거리는 주로 병풍으로 제작됐어요. 그림 안에는 책과 문방사우뿐 아니라 도자기나 각종 화려한 물건도 등장합니다. 단순히 장식하려는 목적 외에도 그림을 그린 사람이 가진 귀중품에 대한 욕망, 자랑하고 싶은 욕심이 동시에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욕망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이기에 현재를 사는 우리 기준에서 표현하고 싶었어요.” 
    <영웅부적> 시리즈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만화 속 주인공이 등장한다. 배트맨, 원더우먼, 슈퍼맨, 아이언맨, 뮬란 등 셀 수도 없이 많은 영웅이 민화 속 도상과 함께 작품을 빼 곡히 채운다. “부적에는 거대한 대의적 소망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바람도 담겨 있어요.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 없지만, 이를 믿는 사람에게는 기댈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죠. 과거 사신도나 무속화에 등장하는 신은 대부분 안녕과 부귀영화를 지켜줬습니다.
    문화와 전통에 따라 양식과 서사가 변하는 것처럼 부적도 현재 복을 원하는 사람의 바람이 직접적으로 반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흔히 볼 수 있는 이 만화 주인공들, 사신도나 무속화에 등장하는 지금의 신과 같은 것이죠.”
 
01. 영웅부적(Gold&red) 150X150cm. Acrylic on canvas. 2017   02. 김민수 작가는 자신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복을 받고 행복해 지기를 기원한다.
03. 데님 - 도자기 속 부귀영화 73X91cm. Acrylic on canvas. 2020

    <영웅부적> 시리즈는 가장 가느다란 세필의 붓털을 뽑아 아이라이너보다 가늘게 만들어 그림을 그린다. 그리다가 한번 멈추면 붓에 물감이 말라버려 같은 느낌을 낼 수 없어 한번 작업을 시작하면 식사도 미룬 채 몇 시간 동안 그림에만 매달린다고 한다. 작가의 말대로 ‘도 닦는 심정’으로 탄생한 그림은 워낙 정교하고 세밀한 탓에 디지털화된 일러스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직접 그린게 아니라는 오해가 늘면서 전시회 때 라이브 방송으로 시연하는 웃지 못할 일화도 있었다.
    “배경색을 가장 심사숙고해서 고르는 편이에요. 제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복을 받고 행복해지기를 기원하며 작업합니다. 실제로 제 그림을 걸어놨더니 사업이 잘 풀렸다거나 돈을 더 잘 벌게 됐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정말로 제 그림 때문은 아니겠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보람이 무척 커요. 민화를 그렸던 옛날 작가들도 같은 마음 아니었을까요?” 
경계를 넘나드는 민화의 변주
    작업실이 있는 대구와 서울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김민수 작가는 회화뿐만 아니라 디자인, 공예등 다양한 영역으로 스펙트럼을 넓히고 있다. 패션디자이너, 가방, 패브릭, 주얼리, 도자기등 여러 분야의 예술가들과 협업한 그는 자신의 모습을 딴 토이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최근 미뤄두었던 주역(周易)을 공부하고 있다는 작가는 <책거리> 시리즈와 <영웅부적> 시리즈에 이어 또 한번 새로운 변신을 고민 중이다.
    “생활 속에서 전통적 소재를 많이 접해서 그런지 문화재에서도 영감을 많이 받아요. 아마 미대를 가지 않았다면 사학이나 문화재 관련 학과를 갔을 것 같아요. 미술관만큼 박물관을 더 즐겨 찾는 편인데 앞으로도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소재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얇고 넓게 섭렵하기를 좋아한다’는 김민수 작가는 40대 초반 나이에 25회의 개인전, 300회 이상의 단체전에 참여 할 만큼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경계를 넘나들며 우리의 민화를 자유롭게 변주하는 그의 다음 작품을 기대해 본다.